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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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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3일 (목) 07:4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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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趙明熙)
22P0GXGFGH 1.jpg
출처 : 서울경제 2021년 07월 22일 칼럼[1]
 
한글명 조명희 한자명 趙明熙 영문명 Cho Myeong-hee 가나명 이칭 포석(抱石)
성별 남성 생년 1894년 몰년 1938년 출신지 충청북도 진천군 전공 철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충북 진천군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연방의 작가, 서른 살 늦깎이 문학 청년, 3·1운동에 가담한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이다.


생애


방황하던 유년 시절

조명희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1894년 8월 10일에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살 때 천자문을 떼고 다양한 한문서적들을 두루 읽으며 당시 진천 사람들로부터 신동이라 불리게 된다.[2] 1906년 민식과 결혼하였다. 1908년 진천에 세워진 첫사립학교인 문명소학교에 입학한다. [3] 결혼생활이 맞지 않아 가까운 청주나 충주의 학교를 그만두고 1910년 서울 중앙고보에 진학했다. 1914년 졸업반이었지만 중앙고보를 중퇴하고 베이징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영웅 전기만을 들고 가출을 감행하여 평양까지 갔지만, 여행증도 없고 형의 만류로 인해 고향 진천으로 되돌아온다. 고향으로 와 국내외 소설을 읽으며 지냈고 레미제라블』을 읽고 크게 감동하여 문학에 뜻을 품는다. 1919년 3월 초,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번졌고, 보름 남짓 만에 진천까지 밀려들었다. 1919년 3·1운동 진천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석 달 동안 구금 생활을 하였다.그 후 새롭게 각성하여 책만 읽고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능동적인 삶을 살기로 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일본에서의 유학생활

1919년 가을, 친구 남준우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쿄 도요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에서 공부했다. 스스로 '일생을 좌우할 분기점'이라고 밝힐 정도였지만 동경 유학 생활은 그에게 매우 힘들었다. 일본에서 급진주의적 경향을 띤 무정부주의 계열의 흑도회에 가입하여 잠시 활동하였다. 웅변 대회에서 열정적인 언변을 함으로써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된 학우회라는 모임의 연극 운동의 핵심 일원이 된다. 학우회에서 애국적 열정을 드러내어 군중들의 애국심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하기도 한다. 이후 1920년 김우진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여 희곡을 창작하고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21년『김영일의 사』를 집필하였다. 포석의 첫 희곡작품이자, 가난한 도쿄 유학생의 비극적인 삶을 그린 자전적 이야기이다. 이 희곡을 가지고 동우회 연극단에서 전국 순회 공연하였다.


문학인 조명희의 본격적인 활동

1923년 희곡 『파사』를 발표하고 한국 최초의 근대 희곡집『김영일의 사』를 동양서원에서 출판하였고 이 해에 유학생활을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취직하였다. 1924년 춘추각에서 노적이란 아호로 시집『봄 잔디밭 위에』를 출간하였다. 1925년 초 이전의 낭만적인 운문시를 버리고 새로운 첫 단편 소설『땅속으로』를 「개벽지」에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호나 필명을 이전과 다른 포석으로 사용하였다. 카프 결성 때 창립 회원으로 가입하여 입지를 분명히 했다. 그 후 카프의 작가 이기영, 한설야와 이념적인 동지로서 두터운 교분을 가지며 무산자 계급운동에 가담했다. 1927년 포석의 대표작『낙동강』를 「조선지광」에 발표하였다.


소련에서 망명 생활

1928년 여름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연해주의 신한촌 등에서 생활, 산문시 「짓밟힌 고려」를 발표하였다. 소련에서는 새로 '조생'이란 필명을 사용하였다. 1929년 연해주 고려인 마을 육성촌 등에서 거주하며 『선봉』에 시를 기고하며 장편 『붉은 깃발 아래서』를 집필하였다. 하지만 내용이 소련에서 수용될 수 없어 발표하지 못한 채 원고마저 분실되었다.[4] 1930년 조선인 육성촌 벼재배 전문 농민학교에서 조선어 교사로 있으면서 문예를 지도하였다. 1931년 동료 교사 활명희와 재혼하였으며 우스리스크로 이사하여 조선사범전문학교에서 조선어문학을 강의하였다. 1934년 작가 파제예프 추천으로소련작가동맹 맹원으로 가입하고 연해주의 한글신문 『선봉』의 문예면 편집을 자문하였다. 1936년 소련작가동맹 원동지부에서 간사로 활동하였고 조선사범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선봉』신문에 문예란을 만들고, 그곳 한글문학 작품집 『로력자의 조국』주필로서 고려인 문학 건설에 이바지하였다.


죽음과 사후 이야기

1937년 스탈린의 명령에의해 조선인들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할 때 반대하였다. 그 후 장편소설 『만주 빨치산』질필 도중 소련 내무인민위원회 기관원에 연행되었다. 그의 가족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다. 1938년 소련 당국으로부터 일제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하바로프스크 현지 주르사 감옥에서 처형당했다.[5] 1956년 스탈린 사후 소련 극동군관구 군법회의는 1938년의 결정을 파기, 무혐의로 처리하고 조명희를 복권시켰다. 1959년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에서 편찬한 『조명희선집』이 소련과학원 동방도서출판사에서 양장본으로 출간되었다. 1988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나보이 문학박물관에 '조명희기념실'을 열었다. 1994년 진천에서 '탄생 100주년 기념 포석 조명희문학제'가 열리고 생가 터에 표지비를 세웠다. 2003년 중국 조선족 자치주에서 해마다 '연변포석조명희문학제'를 열었다. 2006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극동대학교 한국학대학 교정에 '포석 조명희문학비'가 세워졌다.[6]





문학 작품


낙동강

당시 무잡스런 이론만을 앞세워 카프계와 민족진영이 논전을 벌이던, 침체되고 곤혹감을 더하던 우리 문단에 신선한 충격파를 불러 일으켰다.[7] 낙동강은 낙동강 유역에서 어부의 아들로 자란 박성운이 일제의 갈대밭 강탈 등으로 삶의 터전을 위협받게 되자 싸우다가 투옥되고,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낙동강 물을 건너 귀향하다 죽는 내용이 민요조의 이 지방 노래와 함께 재래의 과열된 이념이나 경제투쟁 일변도의 수준을 넘어선, 한국 카프 문학 역사를 통틀어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8] 포석은 이 작품을 쓰기에 앞서 낙동강 연안을 여러 차례 답사하여 현지 방언과 지형을 조사했다고 한다.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Timeline


  • [▶Time라인스프레드시트URL삽입 Timeline Google Spreadsheet]

▶Timeline임베딩

Network Graph






참고자원


『[디지털진천문화대전]』online, 진천군청. 이명재,『조명희 : 그들의 문학과 생애』(한길사, 2008.)





주석


  1. (박진영), 「[오색인문학 혁명의 땅에서 배신 당한 혁명 시인]」,『서울경제』, 2021년.07월.22일.『네이버 뉴스』online, 네이버.
  2. https://www.cbfc.or.kr/cc/sub.php?menukey=6547
  3. 이명재,『조명희 : 그들의 문학과 생애』(한길사, 2008.), 29~30쪽
  4. 디지털진천문화대전 http://aks.ai/GC02700829
  5. 충북문화재단문화관 https://www.cbfc.or.kr/cc/download/11.pdf
  6. http://kor.theasian.asia/archives/342283
  7. 이명재,『조명희 : 그들의 문학과 생애』(한길사, 2008.)
  8. 이명재,『조명희 : 그들의 문학과 생애』(한길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