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29번째 줄: 29번째 줄:
 
==='''방황하던 유년 시절'''===
 
==='''방황하던 유년 시절'''===
 
{{글상자|
 
{{글상자|
|내용= 조명희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1894년 8월 10일에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살 때 천자문을 떼고 다양한 한문서적들을 두루 읽으며 당시 진천 사람들로부터 신동이라 불리게 된다.<ref>https://www.cbfc.or.kr/cc/sub.php?menukey=6547</ref> 1906년 민식과 결혼하였다. 1908년 진천에 세워진 첫사립학교인 문명소학교에 입학한다. <ref>이명재,『조명희 : 그들의 문학과 생애』(한길사, 2008.), 29~30쪽</ref> 결혼생활이 맞지 않아 가까운 청주나 충주의 학교를 그만두고 1910년 서울 중앙고보에 진학했다. 1914년 졸업반이었지만 중앙고보를 중퇴하고 베이징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영웅 전기만을 들고 가출을 감행하여 평양까지 갔지만, 둘째 형인 조경희에게 잡혀?? 고향 진천으로 되돌아온다. 고향으로 와 국내외 소설을 읽으며 지냈고 레미제라블을 읽고 크게 감동하여 문학에 뜻을 품는다. 이후 문학을 위해 동경 유학을 계획하고 돈을 벌러 다니지만, 끝내 빈손으로 귀향하고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달 동안 구금 생활을 하였다. 석방 후, 국내 순회 연극단을 조직하여 계몽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
|내용= 조명희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1894년 8월 10일에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살 때 천자문을 떼고 다양한 한문서적들을 두루 읽으며 당시 진천 사람들로부터 신동이라 불리게 된다.<ref>https://www.cbfc.or.kr/cc/sub.php?menukey=6547</ref> 1906년 민식과 결혼하였다. 1908년 진천에 세워진 첫사립학교인 문명소학교에 입학한다. <ref>이명재,『조명희 : 그들의 문학과 생애』(한길사, 2008.), 29~30쪽</ref> 결혼생활이 맞지 않아 가까운 청주나 충주의 학교를 그만두고 1910년 서울 중앙고보에 진학했다. 1914년 졸업반이었지만 중앙고보를 중퇴하고 베이징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영웅 전기만을 들고 가출을 감행하여 평양까지 갔지만, 여행증도 없고 형의 만류로 인해 고향 진천으로 되돌아온다. 고향으로 와 국내외 소설을 읽으며 지냈고 레미제라블』을 읽고 크게 감동하여 문학에 뜻을 품는다. 1919년 3월 초,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번졌고, 보름 남짓 만에 진천까지 밀려들었다. 1919년 3·1운동 진천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달 동안 구금 생활을 하였다.새롭게 각성하여 책만 읽고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능동적인 삶을 살기로 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
 
}}
  
 
==='''도쿄 대학으로 유학가다.'''===
 
==='''도쿄 대학으로 유학가다.'''===
 
{{글상자|
 
{{글상자|
|내용= 1919년 가을, 친구 남준우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쿄 도요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에서 공부했다. 스스로 '일생을 좌우할 분기점'이라고 밝힐 정도였지만 동경 유학 생활은 그에게 매우 힘들었다. 일본에서 급진주의적 경향을 띤 무정부주의 계열의 흑도회에 가입하여 잠시 활동하였다. 웅변 대회에서 열정적인 언변을 함으로써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된 학우회라는 모임의 연극 운동의 핵심 일원이 된다. 학우회에서 애국적 열정을 드러내어 군중들의 애국심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하기도 한다. 이후 1920년 김우진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여 희곡을 창작하고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21년 희곡 '김영일의 사'를 집필하였고, 이 희곡을 동우회 순회 연극단에서 공연하였다. 1923년 희곡 '파사'를 발표하고 한국 최초의 근대 희곡집 '김영일의 사'를 동양서원에서 출판하였고 이 해에 유학생활을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
|내용= 1919년 가을, 친구 남준우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쿄 도요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에서 공부했다. 스스로 '일생을 좌우할 분기점'이라고 밝힐 정도였지만 동경 유학 생활은 그에게 매우 힘들었다. 일본에서 급진주의적 경향을 띤 무정부주의 계열의 흑도회에 가입하여 잠시 활동하였다. 웅변 대회에서 열정적인 언변을 함으로써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된 학우회라는 모임의 연극 운동의 핵심 일원이 된다. 학우회에서 애국적 열정을 드러내어 군중들의 애국심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하기도 한다. 이후 1920년 김우진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여 희곡을 창작하고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21년『김영일의 사』를 집필하였다. 포석의 첫 희곡작품이자, 가난한 도쿄 유학생의 비극적인 삶을 그린 자전적 이야기이다. 이 희곡을 가지고 동우회 연극단에서 전국 순회 공연하였다. 1923년 희곡 『파사』를 발표하고 한국 최초의 근대 희곡집『김영일의 사』를 동양서원에서 출판하였고 이 해에 유학생활을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취직하였다.
 
}}
 
}}
  
 
==='''문학인 조명희으로의 본격적인 활동'''===
 
==='''문학인 조명희으로의 본격적인 활동'''===
 
{{글상자|
 
{{글상자|
|내용= 1924년 춘추각에서 시집'봄 잔디밭 위에'를 출간하였다.
+
|내용= 1924년 춘추각에서 노적이란 아호로 시집『봄 잔디밭 위에』를 출간하였다. 1925년 초 이전의 낭만적인 운문시를 버리고 새로운 첫 단편 소설『땅속으로』를 「개벽지」에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호나 필명을 이전과 다른 포석으로 사용하였다. 카프 결성 때 창립 회원으로 가입하여 입지를 분명히 했다. 그 후 카프의 작가 이기영, 한설야와 이념적인 동지로서 두터운 교분을 가지며 무산자 계급운동에 가담했다. 1927년 포석의 대표작『낙동강』를 「조선지광」에 발표하였다.
 
}}
 
}}
  
56번째 줄: 56번째 줄:
 
}}
 
}}
  
=='''연구'''==
+
=='''문학 작품'''==
 
----
 
----
==='''제목1'''===
+
==='''낙동강'''===
 
{{글상자|
 
{{글상자|
|내용=
+
|내용= 당시 무잡스런 이론만을 앞세워 카프계와 민족진영이 논전을 벌이던, 침체되고 곤혹감을 더하던 우리 문단에 신선한 충격파를 불러 일으켰다. 낙동강은 낙동강 유역에서 어부의 아들로 자란 박성운이 일제의 갈대밭 강탈 등으로 삶의 터전을 위협받게 되자 싸우다가 투옥되고,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낙동강 물을 건너  귀향하다 죽는 내용이 민요조의 이 지방 노래와 함께 재래의 과열된 이념이나 경제투쟁 일변도의 수준을 넘어선, 한국 카프 문학 역사를 통틀어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포석은 이 작품을 쓰기에 앞서 낙동강 연안을 여러 차례 답사하여 현지 방언과 지형을 조사했다고 한다.
 
}}
 
}}
  

2024년 6월 7일 (금) 10:15 판

인물(Person) 목록으로 이동하기



조명희(趙明熙)
22P0GXGFGH 1.jpg
출처 : 서울경제 사외칼럼[1]
 
한글명 조명희 한자명 趙明熙 영문명 Cho Myeong-hee 가나명 이칭 포석(抱石)
성별 남성 생년 1894년 몰년 1938년 출신지 충청북도 진천군 전공 철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충북 진천군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연방의 작가, 서른 살 늦깎이 문학 청년, 3·1운동에 가담한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이다.


생애


방황하던 유년 시절

조명희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1894년 8월 10일에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살 때 천자문을 떼고 다양한 한문서적들을 두루 읽으며 당시 진천 사람들로부터 신동이라 불리게 된다.[2] 1906년 민식과 결혼하였다. 1908년 진천에 세워진 첫사립학교인 문명소학교에 입학한다. [3] 결혼생활이 맞지 않아 가까운 청주나 충주의 학교를 그만두고 1910년 서울 중앙고보에 진학했다. 1914년 졸업반이었지만 중앙고보를 중퇴하고 베이징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영웅 전기만을 들고 가출을 감행하여 평양까지 갔지만, 여행증도 없고 형의 만류로 인해 고향 진천으로 되돌아온다. 고향으로 와 국내외 소설을 읽으며 지냈고 레미제라블』을 읽고 크게 감동하여 문학에 뜻을 품는다. 1919년 3월 초,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번졌고, 보름 남짓 만에 진천까지 밀려들었다. 1919년 3·1운동 진천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석 달 동안 구금 생활을 하였다.그 후 새롭게 각성하여 책만 읽고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능동적인 삶을 살기로 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도쿄 대학으로 유학가다.

1919년 가을, 친구 남준우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쿄 도요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에서 공부했다. 스스로 '일생을 좌우할 분기점'이라고 밝힐 정도였지만 동경 유학 생활은 그에게 매우 힘들었다. 일본에서 급진주의적 경향을 띤 무정부주의 계열의 흑도회에 가입하여 잠시 활동하였다. 웅변 대회에서 열정적인 언변을 함으로써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된 학우회라는 모임의 연극 운동의 핵심 일원이 된다. 학우회에서 애국적 열정을 드러내어 군중들의 애국심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하기도 한다. 이후 1920년 김우진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여 희곡을 창작하고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21년『김영일의 사』를 집필하였다. 포석의 첫 희곡작품이자, 가난한 도쿄 유학생의 비극적인 삶을 그린 자전적 이야기이다. 이 희곡을 가지고 동우회 연극단에서 전국 순회 공연하였다. 1923년 희곡 『파사』를 발표하고 한국 최초의 근대 희곡집『김영일의 사』를 동양서원에서 출판하였고 이 해에 유학생활을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취직하였다.


문학인 조명희으로의 본격적인 활동

1924년 춘추각에서 노적이란 아호로 시집『봄 잔디밭 위에』를 출간하였다. 1925년 초 이전의 낭만적인 운문시를 버리고 새로운 첫 단편 소설『땅속으로』를 「개벽지」에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호나 필명을 이전과 다른 포석으로 사용하였다. 카프 결성 때 창립 회원으로 가입하여 입지를 분명히 했다. 그 후 카프의 작가 이기영, 한설야와 이념적인 동지로서 두터운 교분을 가지며 무산자 계급운동에 가담했다. 1927년 포석의 대표작『낙동강』를 「조선지광」에 발표하였다.


연해주에서의 망명 생활


제목5





문학 작품


낙동강

당시 무잡스런 이론만을 앞세워 카프계와 민족진영이 논전을 벌이던, 침체되고 곤혹감을 더하던 우리 문단에 신선한 충격파를 불러 일으켰다. 낙동강은 낙동강 유역에서 어부의 아들로 자란 박성운이 일제의 갈대밭 강탈 등으로 삶의 터전을 위협받게 되자 싸우다가 투옥되고,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낙동강 물을 건너 귀향하다 죽는 내용이 민요조의 이 지방 노래와 함께 재래의 과열된 이념이나 경제투쟁 일변도의 수준을 넘어선, 한국 카프 문학 역사를 통틀어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포석은 이 작품을 쓰기에 앞서 낙동강 연안을 여러 차례 답사하여 현지 방언과 지형을 조사했다고 한다.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Timeline


  • [▶Time라인스프레드시트URL삽입 Timeline Google Spreadsheet]

▶Timeline임베딩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https://www.sedaily.com/NewsView/22P0GXGFGH
  2. https://www.cbfc.or.kr/cc/sub.php?menukey=6547
  3. 이명재,『조명희 : 그들의 문학과 생애』(한길사, 2008.), 29~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