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35번째 줄: 35번째 줄:
 
|내용=김1888년 12월 24일 경상도 김해도호부 우부면 답곡리<ref>現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ref>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이용준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br>
 
|내용=김1888년 12월 24일 경상도 김해도호부 우부면 답곡리<ref>現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ref>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이용준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br>
 
6살 무렵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서 인근 고을까지 소문이 났다고 한다.
 
6살 무렵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서 인근 고을까지 소문이 났다고 한다.
 +
}}
 +
==='''신문학에 뜻을 두다'''===
 +
{{글상자
 +
|내용=김광진은 1903년 6월 23일<ref> 김광진의 출생일과 사망일은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위치한 김광진 묘비에 기록된 정보이며, 직접 현지를 조사한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님이 제공한 정보이다.</ref> 평양 대동강변에서 땔감 장사를 하던 아버지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김광진은 공립보통학교가 아니라 {{TagInstitution|[[일신학교|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수학하였다.<ref> 장지연(張志淵)의 청원으로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私立學校’로 인허된 곳이다. 「日新認許」『皇城新聞』, 1906.4.25.</ref> 일신학교에서는 '구한국 시대 교과서'를 사용하고 애국적이고 혁명적인 창가를 가르쳤으며, 김광진의 재학 중에도 학교와 경찰 사이의 충돌이 이어졌으며 결국 그가 졸업하기 직전 학교는 문을 닫았다.<ref>金洸鎭, 「學究四O年の道」,『今日の朝鮮』, 外國文出版社, 1965.3(任正赫,『現代朝鮮の科學者たち』, 彩流社, 1997, 수록), 169-170쪽.</ref><br/>
 +
1917년 김광진은 {{TagInstitution|[[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TagPerson|[[홍종인|홍종인(洪鍾仁)]]}}과 {{TagPerson|[[노동규|노동규(盧東奎)]]}}가 동기생이었으며, {{TagPerson|[[함석헌|함석헌(咸錫憲)]]}}이 1년 선배였다. 이후 1919년 김광진은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울에서 온 학생과 연락을 취하면서 비밀리에 봉기를 준비했다. 우리는 며칠 밤 철야로 수천 장의 국기를 만들고 호신용 단도를 갖춘 채 드디어 {{TagEvent|[[삼일운동|3월 1일을 맞이]]}}하였"으며, "그 해 10월에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60 가까웠던 아버지도 연행되었다".<ref> 金洸鎭, 「學究四O年の道」, 171쪽.</ref><br/>
 
}}
 
}}

2024년 5월 27일 (월) 21:14 판

인물(Person) 목록으로 이동하기



이윤재(李允宰)
이윤재.jpg
출처 : 전통문화포털 이윤재 [1]
 
한글명 이윤재 한자명 李允宰 영문명 Yunjae Lee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888년 몰년 1943년 출신지 경상도 김해도호부 우부면 답곡리 전공 역사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국어학자, 역사학자
3.1 독립운동을 주동함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역사의식을 높이는 교육자였다.




생애


어린시절

김1888년 12월 24일 경상도 김해도호부 우부면 답곡리[2]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이용준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6살 무렵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서 인근 고을까지 소문이 났다고 한다.


신문학에 뜻을 두다

김광진은 1903년 6월 23일[3] 평양 대동강변에서 땔감 장사를 하던 아버지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김광진은 공립보통학교가 아니라 일신학교(日新學校)기관에서 수학하였다.[4] 일신학교에서는 '구한국 시대 교과서'를 사용하고 애국적이고 혁명적인 창가를 가르쳤으며, 김광진의 재학 중에도 학교와 경찰 사이의 충돌이 이어졌으며 결국 그가 졸업하기 직전 학교는 문을 닫았다.[5]
1917년 김광진은 평양고등보통학교기관에 입학하였다. 홍종인(洪鍾仁)인물노동규(盧東奎)인물가 동기생이었으며, 함석헌(咸錫憲)인물이 1년 선배였다. 이후 1919년 김광진은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울에서 온 학생과 연락을 취하면서 비밀리에 봉기를 준비했다. 우리는 며칠 밤 철야로 수천 장의 국기를 만들고 호신용 단도를 갖춘 채 드디어 3월 1일을 맞이사건하였"으며, "그 해 10월에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60 가까웠던 아버지도 연행되었다".[6]

  1. https://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3?brdType=R&thisPage=9&bbIdx=8623&rootCate=&searchField=&searchText=&recordCnt=10
  2. 現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
  3. 김광진의 출생일과 사망일은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위치한 김광진 묘비에 기록된 정보이며, 직접 현지를 조사한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님이 제공한 정보이다.
  4. 장지연(張志淵)의 청원으로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私立學校’로 인허된 곳이다. 「日新認許」『皇城新聞』, 1906.4.25.
  5. 金洸鎭, 「學究四O年の道」,『今日の朝鮮』, 外國文出版社, 1965.3(任正赫,『現代朝鮮の科學者たち』, 彩流社, 1997, 수록), 169-170쪽.
  6. 金洸鎭, 「學究四O年の道」, 1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