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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2일 (수) 23:1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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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준 (白樂俊)
백락준.jpg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한글명 백낙준[1] 한자명 白樂俊 영문명 가나명 이칭 백운학
성별 남성 생년 1876 (또는 1882, 1884)년년 몰년 1930 (또는 1933, 1934, 1935)년년 출신지 조선 충청도 청양군 정산면 덕성리 전공 음악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한국의 국악인이자 거문고 연주가이다. 또한 백낙준은 대한제국 조선 황조 시대와 일제강점기 시대 거문고 산조를 창시한 명인이자 신쾌동(申快童)의 스승이다.



생애


생애초기 및 성장

백낙준은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에서 아버지인 백명수와 어머니인 박길주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896년 20세 되던 해 아버지가 부른 판소리 가락과 시나위 가락을 처음으로 거문고에 옮겨 탄주(彈奏)했고, 뒤에 독주음악으로 체계화시킨 것이 거문고산조이다.[2] 31세가 되는 1914년에는 논산군 강경읍 염천리 37번지로 이주하였다.


생애 중기

거문고산조의 창작가로, 기악명수로, 교육자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40대의 나이에 이른 1910년대 중엽부터였다.[3] 충남 강경을 중심으로 전라도에서 주로 활동하던 백낙준은 1920년대 말 서울에 올라와 무대공연을 많이 펼치면서 1930년에 자기의 거문고산조를 레코드에 취입했다.[4] 이를 계기로 거문고 명수로서 그의 명성도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5] 당시에 전해오던 가야금 산조 양식을 본따서 거문고 산조를 작곡하여 연주하였다고 전한다.[6] 그의 음악적 재능은 폭넓었기 때문에, 경서도잡가(놀량·방아타령·양산도)의 거문고반주를 맡았고, 신방곡(神房曲)의 취입 때 거문고주자로 동참하였다.[7] 이영산홍과 함께 거문고로 취입한 "개성난봉가"·"놀량"·"신방곡"·"신아위" 등을 비롯해 현금산조(玄琴散調)는 일본 빅타음반에 전한다. [8]1933년 거문고산조(잔머리·진양조) 방송을 위해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에 출연하였다.[9]


제목3


제목4


제목5





연구


제목1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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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본명은 백학준
  2. 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
  3. 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
  4. 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
  5. 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
  6. 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
  7. 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
  8. 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
  9. 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