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만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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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녕(CNU2025)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2월 5일 (금) 03:5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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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만갑(宋萬甲)
송만갑.jpg
출처 : 이름별 문화인물,송만갑online, 전통문화포털.
 
한글명 송만갑 한자명 宋萬甲 영문명 Song Mangap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866년 몰년 1939년 출신지 전라남도 구례읍 백련리 전공 판소리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송만갑은 동편제 명문가 출신으로 그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던 명창이었지만 여기에 서편제를 가미해 새로운 소리제를 창조했던 동편제 판소리의 상징적 인물이다.[1] 더욱이 근대적 양식으로 연극 요소를 도입해 대중적인 관심을 유도하는 창극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일제 강점기, 조선성악연구회단체를 결성하고 협률사단체를 조직해 서울은 물론 전국적 공연활동과 후진양성에 헌신하며, 판소리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우는 작업을 했다.[2] 현재까지 이어지는 여러 명창의 계보가 송만갑에서 비롯할 만큼 조선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동편제 판소리의 전설이었다.[3]


생애


출생 및 성장배경

조선 후기의 판소리가왕(歌王) 송흥록(宋興祿)의 후예로 송광록(宋光祿)-송우룡(宋雨龍) 등 동편제 소리를 부르던 가문에서 태어났다.[4] 그동안 가왕 또는 동편제의 시조 등으로 추앙받는 송흥록의 소리를 잇는 명문 가계의 전통이 명창 송만갑의 중요한 성장 배경이 되었다.[5] 또한, 송만갑이 무계출신이라는 것은 제적등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지방의 무속음악과 판소리 전승이 밀접한 상관성이 있어 판소리 명창을 낳게 하고 성장시키는 기층적인 배경으로 세습무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6]


유년기 및 청소년기

송만갑은 증조부 송흥록이 '네가 크면 반드시 내 뜻을 받들어 후세에 전하라'라는 당부를 거듭했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며, 십대 이전에 명창 박만순(朴灣淳)과 아버지 송우룡에게 소리를 배워 일찍이 '소년명창'으로 명성을 얻었다.[7] 다만, 심청이 우는 대목, 춘향이 우는 장면에서는 부친이 아예 굵은 회초리를 옆에다 여러 개 깎아두고 종아리를 때려가며 송만갑을 가르쳤다.[8] 아명(兒名)이 밤쇠이었다.[9] 17세 때에는 전주 ‘대사습놀이’에서 최고의 소리꾼으로 등극해 전국을 누비며 명성을 쌓았다.[10]


상경 이후

1902년 협률사 결성을 위해 고종이 명창들을 불러 모을때 상경하여 합류하였으며, 여기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11] 1902년부터 1905년 사이에는 민영환과 함께 상해를 거쳐 미국까지 다녀왔다.[12] 1904년 러일전쟁의반발로 불안이 고조되고,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지는 등 사회의 불안으로 2년동안 공연이 중단되었다가 1906년 협률사 공연이 재개되어 대중의 인기를 끌었지만, 같은 해 4월 협률사가 해체되었다.[13] 1908년 지방 공연을 목적으로 소리와 춤, 줄타기 등 갖가지 재주를 보여주는 순회 공연단체 ‘협률사’를 다시 조직해 판소리뿐 아니라 창극 무대를 펼치며 공연을 다녔다.[14]


낙향 이후

송만갑은 1910년 8월 공연 중에 한일병탄 소식을 듣고는 곧 해산 후 전남 구례로 낙향해 꾸준히 소리꾼들을 키우다 고향인 순천 낙안으로 이주해 더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15] 송만갑은 구례에서는 오경선의 율방에서 박봉래에게 판소리를 가르치고, 박봉래의 집에서 김정문도 지도하였다.[16] 그리고 이무렵 둘째 아들 송기덕에게 판소리를 가르쳤다.[17]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 이후

1913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 축음기회사에서 음반 취입하였다.[18] 1913년부터 193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유성기 음반 87면에 여러 가지 판소리를 녹음했다.[19] 1918년 구례에서 순천 낙안으로 주소지를 옮겼다.[20] 1933년 백여 명의 명창들이 의기투합해 설립한 '조선성악연구회'설립에 동참해 적극적으로 후진 양성에 힘썼다.[21] 50대부터 작고하기 몇 년전인 70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노년기의 소리가 담긴 유성기 음반에는 그가 즐겨 부른 단가 진국명산과 남도민요 농부가를 비롯해 춘향가, 적벽가, 흥부가. 수궁가, 심청가 등 판소리 다섯마당이 망라되어 있는데, 이미 노년에 이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음반에 담긴 소리들은 연륜을 더할수록 더욱 완성도 높은 예술세계를 들려주어 지칠 줄 모르는 예술 혼을 느끼게 해준다.[22] 뿐만 아니라 송만갑은 1939년 1월 1일 작고하기 직전까지 소리를 가르치는 등, 생애의 끝 날까지 판소리 명창의 예술 혼을 불살랐다.[23] 1939년 74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24]





연구


음반 녹음

송만갑의 소리는 1906년 처음 헐버트 박사의 주선으로 음반에 녹음되어 전국에 라디오로 전파되며 판소리 예술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당시 이 소리를 들은 고종과 순종은 이 유성기 음반은 정녕 조선의 국보며 이들의 소리야말로 조선 최고의 재산이라고 칭송했다.[25] 첫 녹음 이후 1913년, 1926년, 1930년, 1934년까지 단가와 판소리 등 유성기 음반에 그를 비롯해 명창들의 소리를 새겨둔 자료가 새롭게 발견되고 있다.[26] 송만갑의 소리 중 '진국명산'같은 단가는 무려 네 번이나 녹음되어 발매되었고 '박타령','농부가','십장가','고고천변','이별가'등도 두 번 이상 녹음되었는데 그만큼 인기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27]


조선성악연구회

송만갑은 1933년 많은 제자들과 함께 남도음악인들을 규합하여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결성하여 창극과 판소리 공연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28]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송만갑은 교육부장을 맡아 수많은 제자를 양성해,'가장 많은 제자를 둔 명창'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1930년대 후반기부터틑 이동백과 함께 창극'춘향전','흥보전','심청전','숙영낭자전','어촌야화(漁村夜話)'등의 지휘를 맡는 한편, 대원로임에도 불구하고 창극의 단역(端役)을 맡아 동참하는 등, 창극의 발전에 열정을 다 바쳤다.[29] 일제 암흑기 동안 판소리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만, 송만갑과 같은 교육 활동으로 인해 판소리의 전승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당시 그에게서 배운 후대 명창들이 그것을 토대로 해서 우리 시대 판소리를 이끌어올 수 있었다.[30]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송만갑 Group: 조선성악연구회 A isMemberOf B
Person: 송만갑 Group: 협률사 A isMemberOf B
Person: 홍길동 Person: 홍아무개 A hasSon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Book: ○○○ Person: 홍길동 A 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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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판소리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얽매임 없는 예술가, 송만갑online, 지역N문화.
이름별 문화인물, 송만갑online, 전통문화포털.
씨알 하나, "판소리 명창 송만갑의 생애와 예술 세계", 『네이버 블로그 - 씨알 하나』online, 작성일: 2009년 04월 28일.
송만갑online, 디지털남원문화대전.
송만갑(宋萬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석


  1. 판소리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얽매임 없는 예술가, 송만갑online, 지역N문화.
  2. 판소리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얽매임 없는 예술가, 송만갑online, 지역N문화.
  3. 판소리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얽매임 없는 예술가, 송만갑online, 지역N문화.
  4. 이름별 문화인물, 송만갑online, 전통문화포털.
  5. 씨알 하나, "판소리 명창 송만갑의 생애와 예술 세계", 『네이버 블로그 - 씨알 하나』online, 작성일: 2009년 04월 28일.
  6. 씨알 하나, "판소리 명창 송만갑의 생애와 예술 세계", 『네이버 블로그 - 씨알 하나』online, 작성일: 2009년 04월 28일.
  7. 이름별 문화인물, 송만갑online, 전통문화포털.
  8. 씨알 하나, "판소리 명창 송만갑의 생애와 예술 세계", 『네이버 블로그 - 씨알 하나』online, 작성일: 2009년 04월 28일.
  9. 송만갑(宋萬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 판소리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얽매임 없는 예술가, 송만갑online, 지역N문화.
  11. 씨알 하나, "판소리 명창 송만갑의 생애와 예술 세계", 『네이버 블로그 - 씨알 하나』online, 작성일: 2009년 04월 28일.
  12. 송만갑online, 디지털남원문화대전.
  13. 씨알 하나, "판소리 명창 송만갑의 생애와 예술 세계", 『네이버 블로그 - 씨알 하나』online, 작성일: 2009년 04월 28일.
  14. 판소리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얽매임 없는 예술가, 송만갑online, 지역N문화.
  15. 판소리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얽매임 없는 예술가, 송만갑online, 지역N문화.
  16. 씨알 하나, "판소리 명창 송만갑의 생애와 예술 세계", 『네이버 블로그 - 씨알 하나』online, 작성일: 2009년 04월 28일.
  17. 씨알 하나, "판소리 명창 송만갑의 생애와 예술 세계", 『네이버 블로그 - 씨알 하나』online, 작성일: 2009년 04월 28일.
  18. 씨알 하나, "판소리 명창 송만갑의 생애와 예술 세계", 『네이버 블로그 - 씨알 하나』online, 작성일: 2009년 04월 28일.
  19. 이름별 문화인물, 송만갑online, 전통문화포털.
  20. 씨알 하나, "판소리 명창 송만갑의 생애와 예술 세계", 『네이버 블로그 - 씨알 하나』online, 작성일: 2009년 04월 28일.
  21. 판소리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얽매임 없는 예술가, 송만갑online, 지역N문화.
  22. 이름별 문화인물, 송만갑online, 전통문화포털.
  23. 이름별 문화인물, 송만갑online, 전통문화포털.
  24. 씨알 하나, "판소리 명창 송만갑의 생애와 예술 세계", 『네이버 블로그 - 씨알 하나』online, 작성일: 2009년 04월 28일.
  25. 판소리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얽매임 없는 예술가, 송만갑online, 지역N문화.
  26. 판소리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얽매임 없는 예술가, 송만갑online, 지역N문화.
  27. 씨알 하나, "판소리 명창 송만갑의 생애와 예술 세계", 『네이버 블로그 - 씨알 하나』online, 작성일: 2009년 04월 28일.
  28. 이름별 문화인물, 송만갑online, 전통문화포털.
  29. 이름별 문화인물, 송만갑online, 전통문화포털.
  30. 씨알 하나, "판소리 명창 송만갑의 생애와 예술 세계", 『네이버 블로그 - 씨알 하나』online, 작성일: 2009년 04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