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Heritage:L36-0137-0000

mok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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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진지

영문 해설문

현장 안내판 해설문 내용 - 영문

Mokpo Naval Base Site
Jeollanam-do Cultural Heritage Material No. 137
Designation Date: January 15, 1987

This historic site is where the naval base called Mokpojin was established in 1439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of Joseon to protect the sea routes in the area.

The defense efforts of the Mokpojin Naval Base were largely focused on the waters off Mokpo until 1501, when a naval fort was built with a defensive wall measuring 2 meters in height and 400 meters in length. The fort has four fates placed in the four cardinal directions, and contains government offices with a public guesthouse, a jail, and a well.

The fort’s coastal defense battery was closed in 1895 when Joseon reformed its military system, but the rest of the facilities were used to house the government offices of the Korean Empire, including the Office of Tㄱade Supervision (Gamniseo) and the Maritime Customs House (Haegwan), after 1897 when the port of Mokpo was opened to the outside world. That is why the Mokpojin site is widely regarded as an important part of Mokpo’s historical heritage and the starting point of its modern history. The site was designated as a Jeollanam-do Cultural Material in 1987, and was renovated and developed into a history park in 2014.

The name of the district in which the site is located, Mango-dong, originated from the naval based established during the Joseon period, which was headed by the Manho, or “commander of ten thousand households”. The Joseon soldiers stationed in the coaster fort and their families living around it became the roots of today’s modern port city of Mokpo.

구 현장 안내판 1

Mokpojin site
Cultural Property Material No. 137
Jeollanam-do, Mokpo-si, Mango-dong 1-56

Mokpojin site was the navy camp during Chosun dynasty, and called Manhojin because Head of Jin, Mango, was arranged. Geographically, Mokpo is holding an estuary of Yeongsan river, and located in geographical strategic position connecting to the sea. Also it was used for grain transfer way as it is connected between Honam and south of Keongsang province. Therefore, Mokpojin was recognized as an important location even from early Chosun Dynasty.

Construction of the Mokpojin was approved in the 21th year of King Sejong’s reign (1439), and full completing was done in the 8th year of reign of king Yeonsangun (1502). According to the record of Muheonbigo, the stone wall was 1306 cheok in circumference and 7 cheok* 3 chon* tall. There used to be a pond and a well here.

After that, Mokpojin played the defending role of the west and south sea area of Korean Peninsula. However, the camp was closed by Royal Order No. 141, which was announced on July 15th in the 32nd year of the reign of King Gojong (1895), and only a memorial monument survived here since that time. Mokpo City completed the recovery construction in 2013, and now we see that partial recovery Mokpojin.

  • Manho : military position
  • Muheonbigo : literature remark
  • cheok, chon : the Korean foot (1 Cheok = 30.3 cm, 1 chon = 3.3 cm)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해설문 - 영문

  • 국가지정문화재가 아니라 해당 사항 없음.

국문 해설문

현장 안내판 해설문 내용 - 국문

목포진지
木浦鎮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7호
지정일 1987.01.15.

진지(鎭址)란 군사상 중요한 지역에 설치한 진이 있던 터를 말한다. 목포진지는 세종 때인 1439년에 주변의 바닷길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수군 기지인 ‘목포진’의 터이다.

목포진은 초기에는 해상에서 방어 활동을 하다가 1501년 연산군 대에 이르러 성벽이 지어졌다. 성벽의 높이는 약 2m, 성의 둘레는 400m 정도이다. 동서남북 사방에 출구가 있고, 내부에 객사(客舍)와 관아(官衙)를 비롯하여 감옥과 우물 등이 있었다.

포진은 1895년 군사 제도 개편에 따라 폐지하였으나 1897년에 목포가 개항하면서 이곳의 주요 시설들을 대한 제국의 관청인 감리서와 해관 등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목포진은 목포 역사의 뿌리이자 근대사의 출발지라는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87년에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였고 2014년에 역사공원 형태로 일부 유적을 복원하였다.

이 동네의 이름을 ‘만호동’이라 부르게 된 것은 조선 시대 만호가 운영하던 수군진이 있던 곳이라는 데에서 유래했다. 조선 시대부터 목포진 주변에 진을 지키는 사람들과 식솔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오늘날 목포 사람들의 뿌리가 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구 현장 안내판 1

목포진 역사공원 배치도

  1. 현위치
  2. 안내판
  3. 진입광장
  4. 유적비
  5. 홍살문
  6. 내삼문
  7. 객사
  8. 육각정자
  9. 전망공간
  10. 편의공간
  11. 열린쉼터
  12. 관리실 (화장실)


목포진 전경(1930년대)

  • 1930년대 유달산에서 목포진유적지를 바라보고 촬영한 사진
  • 2014년 유달산에서 바라본 목포진 전경
  • 무안 목포진 고지도(1872년)


목포진(木浦鎭)
지정별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7호
위치 : 전라남도 목포시 만호동 1-56

목포진은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이며, 진의 우두머리인 만호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진 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리상으로 볼 때 목포는 영산강 하구를 안고 있으며, 바다로 연결되는 지리적인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남과 경상남부지역으로 통하는 세곡 운반로로 사용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목포는 조선초기부터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주목받게 되었다.

1439년 (세종 21년) 처음 목포진의 설치가 재가 되었으며, 성의 모습이 갖추어 진 것은 1502년 (연산군 8년)으로 전해진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당초 진성의 규모는 석축둘레 1,306척, 높이 7척 3촌이었으며, 우물과 못이 각 1개소씩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목포진은 한반도 서남해의 방어지역으로써 그 역할을 다 했으나 1895년 (고종 32년) 7월 15일 고종 칙령 제141호에 의해 폐진 되었다. 폐진 된 이후 목포진 유적비만이 남아있던 곳을 2014년 현재의 모습으로 일부 복원하였다.


목포진 추정 조감도

  1. 객사
  2. 객사문
  3. 홍살문
  4. 아사
  5. 아사문
  6. 군기고
  7. 사령청
  8. 장청
  9. 이청
  10. 고사
  11. 우물
  12. 휴계시설
  1. 객사(客舍) 고려, 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官舍)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매월 초하루의 보름에 향망궐배(向望闕拜 : 달을 보면서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림)하는 한편, 관찰사 순행시는 집무실로, 사신과 관리들에겐 숙소 및 접대장소로 이용된 공간
  2. 객사문(客舍門) 삼문(三門)으로써 사당이나 제실에 쓰는 문의 형식으로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구분된다. 세 칸 중 어칸(가운데 칸)은 혼(魂)이 다니는 문이라 하여 사람이 쓰지 않고 ‘동입서출(東入西出)’ 이라 하여 사람들은 동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나온다.
  3. 홍살문 능(陵), 원(園), 묘(廟), 궁전, 관아 등의 정면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문이다. ‘붉은 화살 문’ 이라는 뜻으로 홍전문(紅箭門), 홍문(紅門) 이라고도 한다.
  4. 아사(衙舍) 집무를 보았던 동헌이나 관사 기능인 내아 등의 관아 공간
  5. 아사문(衙舍門) 아사로 출입하는 문
  6. 군기고(軍器庫) 군기를 관리 출납하고 병장기(兵仗器)의 재료를 징발하고 제조하는 관리기관
  7. 사령청(使令廳) 장교청의 하부 기관으로 사령들의 집무실로 사용되던 곳
  8. 장청 군관청 수교와 장교들이 범죄 수배 업무를 처리하는 곳
  9. 이청(吏廳) 이방을 중심으로 한 이서들의 집무실
  10. 고사(庫) 수장고(창고)
  11. 옥(獄) 감옥(監獄)
  12. 우물

구 현장 안내판 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해설문 - 국문

목포진지 (木浦鎭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7호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시설
수량/면적 : 일원
지정(등록)일 : 1987.01.15
소 재 지 : 전남 목포시 만호동 1-56번지
소유자(소유단체) :
관리자(관리단체) : 목포시

목포지역은 예부터 내륙과 해상을 연결하는 군사상의 요충지였는데, 목포진은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으로 목포영, 목포대라고 부른다. 조선 왕조 때 각 도의 여러 진에 붙은 종 4품의 무관인 만호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영, 만호진, 만호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러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조선 세종 15년(1433)에 목포병선을 황원(현재 해남)으로 옮기고, 세종 21년(1439)에 현재의 자리에 목포 만호진을 설치하였으며, 개항과 함께 고종 21년(1895)에 폐진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목포 만호진의 성이나 유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원래 위치는 대략 현재의 목포시 만호동 일대일 것으로 추측되며, 이 일대 민가의 담장이나 축대에서 당시의 돌을 확인할 수 있다.

만호진의 성은 일본 영사관, 영국 영사관 기지로 사용되다가 민가로 전용되었으며, 만호동 공터에는 목포진 유적비라고 적힌 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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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안내판
구 현장 안내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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