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하도 육지면재배(高下島_陸地綿栽培)는 일본 통감부 시절인 1904년(명치 37년) 목포주재 영사 若松兎三郞이 시작(試作)을 계획하였고, 미국 종자를 비롯한 면종자(綿種子) 10여종을 농사 시험장(畿內支場)으로부터 배포를 받아서 고하도에 파종했다. 그 결과, 고하도는 성적이 양호하여 재배에 알맞은 지역으로 판정되고 육지면 재배의 시작지가 되었다. 목포는 면화 생산지와 식민지 공출항이 한 곳에 버무려진 서글픈 조화였는데, 1936년 8월 27일에는 육지면 재배 성공 30주년 기념식도 있었다. 그때까지 조선전도의 생산고는 1억7천만근에 도달했고, 그 가운데 전남의 생산량은 약 40%에 해당되었다. 전조선면업대회로 치뤄진 ‘재배장려 30주년 기념식’에는 총경비 7천원이 소요되었고, 기념식은 ‘목포소학교’ 강당에서 거행되었으며, 발상지 관련 기념비 건립과 면업 공로자 표창, 그리고 기념 강연회와 면제품 진열회 등을 설치하였다.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