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FC_1101史記世家
史記世家曰:「孔子名丘,字仲尼。其先宋人。父叔梁紇,母顏氏。以魯襄公二十二年庚戌之歲十一月庚子,生孔子於魯昌平鄉陬邑。為兒嬉戲,常陳俎豆,設禮容。及長,為委吏,料量平;委吏,本作季氏史。索隱云:一本作委吏,與孟子合。今從之。為司職吏,畜蕃息。職,見周禮牛人,讀為樴,義與杙同,蓋繫養犧牲之所。此官即孟子所謂乘田。適周,問禮於老子,既反,而弟子益進。昭公二十五年甲申,孔子年三十五,而昭公奔齊,魯亂。於是適齊,為高昭子家臣,以通乎景公。有聞韶、問政二事。公欲封以尼谿之田,晏嬰不可,公惑之。有季孟吾老之語。孔子遂行,反乎魯。定公元年壬辰,孔子年四十三,而季氏強僭,其臣陽虎作亂專政。故孔子不仕,而退修詩、書、禮、樂,弟子彌眾。九年庚子,孔子年五十一。公山不狃以費畔季氏,召,孔子欲往,而卒不行。有答子路東周語。定公以孔子為中都宰,一年,四方則之,遂為司空,又為大司寇。十年辛丑,相定公會齊侯于夾谷,齊人歸魯侵地。十二年癸卯,使仲由為季氏宰,墮三都,收其甲兵。孟氏不肯墮成,圍之不克。十四年乙巳,孔子年五十六,攝行相事,誅少正卯,與聞國政。三月,魯國大治。齊人歸女樂以沮之,季桓子受之。郊又不致膰俎於大夫,孔子行。魯世家以此以上皆為十二年事。適衛,主於子路妻兄顏濁鄒家。孟子作顏讎由。適陳,過匡,匡人以為陽虎而拘之。有顏淵後及文王既沒之語。既解,還衛,主蘧伯玉家,見南子。有矢子路及未見好德之語。去適宋,司馬桓魋欲殺之。有天生德語及微服過宋事。又去,適陳,主司城貞子家。居三歲而反于衛,靈公不能用。有三年有成之語。晉趙氏家臣佛肸以中牟畔,召孔子,孔子欲往,亦不果。有答子路堅白語及荷蕢過門事。將西見趙簡子,至河而反,又主蘧伯玉家。靈公問陳,不對而行,復如陳。據論語則絕糧當在此時。季桓子卒,遺言謂康子必召孔子,其臣止之,康子乃召冉求。史記以論語歸與之歎為在此時,又以孟子所記歎辭為主司城貞子時語,疑不然。蓋語孟所記,本皆此一時語,而所記有異同耳。孔子如蔡及葉。有葉公問答、子路不對、沮溺耦耕、荷蓧丈人等事。史記云:「於是楚昭王使人聘孔子,孔子將往拜禮,而陳蔡大夫發徒圍之,故孔子絕糧於陳蔡之間。」有慍見及告子貢一貫之語。按是時陳蔡臣服於楚,若楚王來聘孔子,陳蔡大夫安敢圍之?且據論語,絕糧當在去衛如陳之時。楚昭王將以書社地封孔子,令尹子西不可,乃止。史記云「書社地七百里」,恐無此理。時則有接輿之歌。又反乎衛,時靈公已卒,衛君輒欲得孔子為政。有魯衛兄弟及答子貢夷齊、子路正名之語。而冉求為季氏將,與齊戰有功,康子乃召孔子,而孔子歸魯,實哀公之十一年丁巳,而孔子年六十八矣。有對哀公及康子語。然魯終不能用孔子,孔子亦不求仕。乃敘書傳禮記,有杞宋、損益、從周等語。刪詩正樂,有語大師及樂正之語。序易彖、繫、象、說卦、文言。有假我數年之語。弟子蓋三千焉,身通六藝者七十二人。弟子顏回最賢,蚤死,後惟曾參得傳孔子之道。十四年庚申,魯西狩獲麟,有莫我知之歎。孔子作春秋。有知我罪我等語。論語請討陳恆事,亦在是年。明年辛酉,子路死於衛。十六年壬戌、四月己丑,孔子卒,年七十三,葬魯城北泗上。弟子皆服心喪三年而去,惟子貢廬於冢上,凡六年。孔子生鯉,字伯魚,先卒。伯魚生伋,字子思,作中庸。」子思學於曾子,而孟子受業子思之門人。
『사기』 공자세가에 이렇게 말했다. "공자는 이름이 丘, 자가 仲尼이다. 그 선조는 송나라 사람이다. 아버지는 숙량흘, 어머니는 안씨다. 노 양공 22년 경술년 11월 경자일에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공자를 낳았다. 어려서 놀 때 늘 조두(俎豆)를 벌여놓고 예의 모습을 갖추었다. 자라서는 위리(委吏)가 되어 되질과 저울질을 공평히 했고, 위리는 본래 '계씨의 사(史)'로 되어 있다. 『사기색은』에 "어떤 판본에는 위리로 되어 있어 『맹자』와 합치한다" 했으므로 이제 그것을 따른다. 사직리(司職吏)가 되어서는 가축이 번식했다. 職은 『주례』 우인(牛人)에 보이는데 樴으로 읽으며 뜻은 杙(말뚝)과 같으니, 희생을 매어 기르는 곳이다. 이 벼슬이 곧 『맹자』의 이른바 승전(乘田)이다.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를 묻고 돌아오자 제자가 더욱 늘었다.
소공 25년 갑신년, 공자 나이 서른다섯에 소공이 제나라로 달아나 노나라가 어지러웠다. 이에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의 가신이 되어 경공과 통했다. 〈소(韶)를 들은 일〉과 〈정사를 물은 일〉 두 가지가 있다. 경공이 니계의 땅에 봉하려 했으나 안영이 반대하여 경공이 미혹되었다. "계씨와 맹씨의 중간으로 대우하겠다, 나는 늙었다"는 말이 있다. 공자가 마침내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정공 원년 임진년, 공자 나이 마흔셋에 계씨가 강성하여 참람했고 그 가신 양호가 난을 일으켜 정사를 전횡했다. 그러므로 공자는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 시·서·예·악을 닦으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9년 경자년, 공자 나이 쉰하나. 공산불뉴가 비읍을 근거로 계씨에게 반란하며 부르자 공자가 가려 했으나 끝내 가지 않았다. 자로에게 답한 "동주(東周)" 말이 있다. 정공이 공자를 중도재로 삼으니 일 년 만에 사방이 본받았고, 마침내 사공이 되었다가 또 대사구가 되었다. 10년 신축년에 정공을 도와 협곡에서 제후(齊侯)와 회맹하니 제나라가 침탈했던 노나라 땅을 돌려주었다. 12년 계묘년에 중유를 계씨의 재로 삼아 삼도(三都)를 허물고 그 갑병을 거두게 했다. 맹씨가 성(成)을 허물려 하지 않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14년 을사년, 공자 나이 쉰여섯에 재상의 일을 대행하여 소정묘를 베고 국정에 참여하니 석 달 만에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제나라가 여악(女樂)을 보내 저지하자 계환자가 받았다. 교제(郊祭) 뒤에 또 번조(膰俎)를 대부에게 보내지 않으니 공자가 떠났다. 「노세가」는 이 이상을 모두 12년의 일로 삼았다.
위나라로 가서 자로의 처형 안탁추의 집에 머물렀다. 『맹자』에는 안수유로 되어 있다. 진나라로 가다가 광 땅을 지나는데 광 사람들이 양호로 여겨 붙잡았다. "안연이 뒤처졌다"는 말과 "문왕이 이미 돌아가셨다"는 말이 있다. 풀려나 위나라로 돌아가 거백옥의 집에 머물며 남자(南子)를 만났다. 자로에게 맹세한 말과 "덕을 좋아하기를 색을 좋아하듯 하는 자를 보지 못했다"는 말이 있다. 떠나 송나라로 가니 사마 환퇴가 죽이려 했다. "하늘이 내게 덕을 내셨다"는 말과 미복으로 송나라를 지난 일이 있다. 또 떠나 진나라로 가서 사성정자의 집에 머물렀다. 삼 년을 지내고 위나라로 돌아왔으나 영공이 쓰지 못했다. "삼 년이면 이룸이 있다"는 말이 있다. 진(晉)나라 조씨의 가신 필힐이 중모를 근거로 반란하여 공자를 부르니 공자가 가려 했으나 역시 실행되지 않았다. 자로에게 답한 "견백(堅白)" 말과 삼태기를 멘 자가 문 앞을 지난 일이 있다. 서쪽으로 조간자를 만나러 가다가 황하에 이르러 돌아와 다시 거백옥의 집에 머물렀다. 영공이 진법을 묻자 대답하지 않고 떠나 다시 진나라로 갔다. 『논어』에 따르면 양식이 끊긴 일은 마땅히 이때에 있어야 한다.
계환자가 죽으며 강자에게 반드시 공자를 부르라 유언했으나 그 신하가 막아 강자는 이에 염구를 불렀다. 『사기』는 『논어』의 "돌아가리라"는 탄식을 이때의 일로 보았고, 또 『맹자』에 기록된 탄식의 말을 사성정자에게 머물 때의 말로 보았으나 그렇지 않은 듯하다. 대개 『논어』와 『맹자』에 기록된 것이 본디 모두 이 한때의 말인데 기록에 이동(異同)이 있을 뿐이다. 공자가 채나라와 섭 땅에 갔다. 섭공의 문답, 자로가 대답하지 않은 일, 장저·걸닉이 나란히 밭 간 일, 삼태기를 멘 노인 등의 일이 있다. 『사기』에 "이에 초 소왕이 사람을 보내 공자를 초빙하니 공자가 가서 배례하려 했는데 진·채의 대부가 무리를 풀어 포위했다. 그러므로 공자가 진·채 사이에서 양식이 끊겼다"고 했다. "성난 얼굴로 뵌" 일과 자공에게 일러준 일이관지(一以貫之)의 말이 있다. 살피건대 이때 진·채는 초나라에 신복하고 있었으니, 만약 초왕이 와서 공자를 초빙했다면 진·채의 대부가 어찌 감히 포위했겠는가. 또 『논어』에 따르면 양식이 끊긴 일은 마땅히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갈 때에 있어야 한다. 초 소왕이 서사(書社)의 땅으로 공자를 봉하려 했으나 영윤 자서가 반대하여 그쳤다. 『사기』에 "서사의 땅 칠백 리"라 했으나 그럴 리 없을 듯하다. 이때에 접여의 노래가 있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오니 이때 영공은 이미 죽고 위나라 임금 첩(輒)이 공자를 얻어 정사를 맡기려 했다. "노나라와 위나라는 형제"라는 말, 자공에게 답한 백이·숙제의 말, 자로에게 답한 정명(正名)의 말이 있다. 그런데 염구가 계씨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와 싸워 공을 세우자 강자가 이에 공자를 불러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왔으니, 실로 애공 11년 정사년이고 공자 나이 예순여덟이었다. 애공과 강자에게 답한 말이 있다.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쓰지 못했고 공자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이에 『서전(書傳)』과 『예기』를 서술하고 기(杞)·송(宋), 손익(損益), 종주(從周) 등의 말이 있다. 『시』를 산정하고 악을 바로잡고 태사에게 이른 말과 악이 바로잡혔다는 말이 있다. 『역』의 단(彖)·계(繫)·상(象)·설괘·문언을 차례 지었다. "내게 몇 해를 빌려준다면"이라는 말이 있다.
제자가 대개 삼천이었고 몸소 육예에 통한 자가 일흔둘이었다. 제자 중 안회가 가장 어질었으나 일찍 죽었고, 뒤에는 오직 증삼만이 공자의 도를 전해 받았다. 14년 경신년에 노나라가 서쪽에서 사냥하여 기린을 잡으니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는 탄식이 있었다. 공자가 『춘추』를 지었다. "나를 알아주는 것도 나를 죄주는 것도"라는 말이 있다. 『논어』의 진항(陳恆)을 토벌하기를 청한 일도 이 해에 있다. 이듬해 신유년에 자로가 위나라에서 죽었다. 16년 임술년 4월 기축일에 공자가 죽으니 나이 일흔셋이었고 노나라 성 북쪽 사수 가에 장사지냈다. 제자들이 모두 심상(心喪) 삼 년을 입고 떠났으나 오직 자공만이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모두 육 년을 지냈다. 공자가 鯉를 낳았으니 자가 백어이고 먼저 죽었다. 백어가 伋을 낳았으니 자가 자사이고 『중용』을 지었다." 자사는 증자에게 배웠고 맹자는 자사의 문인에게 수업했다.
저본 ctext.org id=89585 · 할주는 저본에서 본문과 이어져 있던 것을 역자가 갈라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