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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29일 (수) 09:55 기준 최신판




설명

역삼동식 집자리는 평면 형태가 장방형 또는 세장방형이며, 구덩식(竪穴式)이나 평지식(平地式)의 화덕 자리저장 구덩이, 그리고 기둥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우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청동기 시대 집자리의 한 형식이다. 역삼동 유형, 흔암리 유형 또는 두 유형을 하나의 개념으로 보는 역삼동·흔암리 유형의 전형적인 집자리이다. 역삼동·흔암리 유형은 역삼동식 집자리, 구멍무늬(孔列文)와 골아가리(口脣刻目)가 결합된 소위 역삼동식 토기와 구멍무늬와 골아가리에 겹아가리(二重口緣)와 짧은 빗금무늬(短斜線文)가 결합된 소위 흔암리식 토기, (피 홈) 자루 간 돌검(血溝二段柄式石劍), 삼각 오목 돌살촉(三角灣入石鏃), 턱 슴베 돌살촉(二段莖式石鏃), 반달 돌칼 등을 중심으로 한다.

1960년대에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서울 역삼동 유적의 집자리에서는 화덕 자리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역삼동식 토기가 최초로 출토되었기 때문에 역삼동 유형의 집자리로서 역삼동식 집자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연구자가 많다. 보령 관산리 유적을 표지로 하는 관산리식 집자리흔암리 유적에서 조사된 흔암리식 집자리와 동일한 개념이다.

역삼동식 집자리는 구덩식이나 평지식의 화덕 자리가 하나인 것에서 5~6개와 같이 복수로 존재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저장 구덩이는 대체로 긴 벽 쪽이나 짧은 벽 쪽 가까이에 시설되어 있다. 역삼동식 집자리는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에는 대체적으로 장방형이나 세장방형이 많지만 송국리 단계가 되면 장방형이 대부분이다. 가옥 규모의 변천에 수반하여 화덕의 수도 연동하는 경향이 강하다. 집자리 가운데에는 가옥을 개축하거나 확장한 흔적도 자주 확인되며, 가옥 규모의 확대는 거주 인원의 수가 증가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前期), 기원전 13~9세기에 역삼동식과 가락동식 집자리는 오랜 기간 공존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역삼동식 집자리는 구덩식이나 평지식의 화덕 자리와 기둥 구멍을 이용한 기둥 배치 방식이며, 가락동식 집자리는 돌 두름식 화덕 자리와 초석을 이용한 기둥 배치 방식이라는 점에서 두 집자리는 큰 차이가 있다. 이 시기에 역삼동식 집자리는 남한 전역에 분포하는데, 가락동식 집자리가 밀집 분포하는 차령산맥 이남의 충청 동남부 지역에는 분포 밀도가 떨어지는 특징이 있다. 기원전 9~5세기에 역삼동식 집자리는 이른 시기의 전통이 계속 이어지는 한편, 영서 지역에서는 천전리식 집자리로, 영남 동남부 지역에서는 검단리식(울산식) 집자리로 바뀌는 변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경기 남부와 충청 북부 지역에서 역삼동식 집자리가 휴암리식 집자리(또는 반송리식 집자리)로 변화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역삼동식 집자리는 청동기 시대 기원전 13~5세기까지 존속한 주거 형식으로 남한 지역 주거 문화의 근간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점에서 고고학적인 가치는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