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靑銅器時代)
| 주요 정보 | |
|---|---|
| 이칭·별칭 | 무문 토기 시대, 민무늬 토기 시대 |
| 키워드 | 청동기, 민무늬 토기, 비파형동검, 비파형동검 문화, 세형동검 문화, 고인돌 |
| 시대 | 청동기 |
| 위치 | 대한민국 |
| 지역 | 춘천 중도동 유적 |
| 수록사전 |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시대편) |
| 집필자 | 김범철 |
| 상세 정보 | |
| 성격 | 고고학연구 |
설명
인류가 청동기를 제작·사용하면서 문화적 진화를 이룬 시기. 청동기 시대는 1816년 톰센(Christian J.Thomsen)이 덴마크 왕립박물관의 선사유물을 석기·청동기·철기로 분류·전시하면서 확산되었던 삼시대 체계(Three Age System)의 전통을 잇는 편년 체계의 일부이다. 세계적으로는 청동 도구의 사용 외에도 도시의 등장, 문명으로의 진입, 초보적 문자의 사용 등을 이 시대의 주요 특징으로 인식한다. 삼시대 체계가 구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수용되어 왔던 만큼 ‘청동기 시대’라는 명칭과 그 사회 문화적 의미도 널리 인정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대륙에서는 거의 수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초 이 체제를 따르던 구대륙의 일부 나라가 자신들의 고고학적 양상에 맞춰 변형하여 사용하는 것도 주목해야 할 경향이다.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를 ‘민무늬 토기 시대’ 또는 ‘무문 토기 시대’로 대체하자는 주장도 청동기에 비중을 둔 명칭이 문화적 특성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시대의 개시를 청동기가 아니라, 민무늬 토기 제작 전통의 등장에 주목한 것부터 그러하다.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한반도와 중국 동북 지방에서 민무늬 토기의 제작 전통은 기원전 20~15세기에 나타나는데, 지역에 따라 약간의 편차는 있다. 시대의 역동성을 이해하기 위한 세부 편년도 주로 토기 양식의 변천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독(甕), 깊은 바리(深鉢), 얕은 바리(淺鉢)나 주발(盌), 항아리(壺), 굽다리 토기(豆形土器) 등이 민무늬 토기의 주요 기종들이지만, 그보다는 공귀리식 토기, 미송리식 토기, 돋을띠 골무늬 토기(突帶刻目文土器), 팽이 토기와 구멍 무늬 토기(孔列文土器), 역삼동식 토기, 가락동식 토기, 흔암리식 토기, 송국리식 토기, 덧띠 토기(粘土帶土器) 등의 명칭이 더 빈번하게 사용되어 왔다. 대표 유적이나 특정 부위의 양식적 특징을 부각하는 명칭이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문화의 시간성과 지역성을 더 효과적으로 반영한다고 인식해왔기 때문이다.
주거 양식도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문화의 시공에 따른 변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평면 형태, 화덕의 형태, 기둥의 배치 등 요소의 조합에 주목하면서 미사리식, 가락동식, 흔암리식, 송국리식 등 대표 유적의 이름을 따라 형식을 설정하고, 시간성을 인지하는 표지(標識)로 삼기도 한다. 이러한 주거들이 모여, 생산 및 소비나 혈연적 단위로 작동했을 가구군(家口群)을 이루기도 하고 최종적으로는 취락을 형성하게 된다. 곳곳에서 확인되는 취락 유적의 수와 분포 밀도로 보건대, 적어도 한반도 중·남부 사회는 청동기 시대에 들면서 본격적인 취락 생활은 물론, 급격한 인구 증가를 경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반적인 인구 성장과 함께 특정 지점으로의 인구 집중도 현저해진다. 춘천 중도동, 천안 백석동, 부여 송국리, 울산 신화리, 진주 대평리 등 대규모 취락의 등장은 그 산물이다. 이들은 다른 취락에 비해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하면서 광역적인 취락 체계에서 중핵(中核)적인 위치를 점한다. 중핵 취락 주변에는(1차) 생산을 담당하거나 옥외 저장 시설이 집중된 취락들이 입지하면서 취락 연결망의 안정성을 도모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대규모 취락의 형성이나 취락 체계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도시 혁명(urban revolution)’으로 일컬을 만한 사회문화적 ‘진보(progression)’를 찾을 수는 없다. 성벽, 궁전, 신전, 정연한 도로 체계, 분절적 문자 체계, 국가 조직 등 초기 문명 발상지의 양상에 의거한 일반적 기준을 한국 청동기 시대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또한 대체적(代替的)인 시대 명칭을 요구하게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비록 청동기 시대라고는 하지만 상당 기간 동안 청동기가 현저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동기는 중요한 사회 문화적 의미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른 시기에 비정되는 소형 장신구나 손칼(刀子) 등이 있기는 하지만 사회 문화적 의미가 부각되는 것은, 기원전 10세기 비파형동검이 등장하고, 제작 기술과 양식에서 중국 중위안(中原)이나 북방 초원 지대 청동기 문화와는 구분되는 ‘비파형동검 문화(琵琶形銅劍文化)’가 형성되면서부터이다. 비파형동검은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지만 드물게 집자리에서도 확인되어 부장품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위세품(威勢品) 또는 의례구(儀禮具)로도 기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비파형동검 문화를 계승한 ‘세형동검 문화(細形銅劍文化)’에서 청동기의 사회적 위상은 더욱 강화되고, 그 제작 기술의 수준도 한층 높아진다. 대전 괴정동, 예산 동서리, 아산 남성리 등 한반도 중서부 지역의 돌무지널무덤(積石木棺墓)에서 출토되는 기하학무늬 거울이나 방패 모양 청동기(防牌形銅器), 나팔 모양 청동기(喇叭形銅器), 견갑 모양 청동기(肩甲形銅器) 등 의기(儀器)류는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이러한 청동 유물은 랴오허강(遼河) 중류역 정자와쯔 유형(鄭家窪子類型)과의 문화적 친연성은 물론, 기원전 5~4세기 이후 전국(戰國) 시대 연(燕)나라의 확장, 고조선과의 갈등 등 동북아시아의 격동을 반영한다. 청동 유물의 조합과 분포에서 보이는 위계적 체계는 그러한 사회 정치적 격동이 유발한 한반도 중·남부사회 재편의 일면을 추정하게 한다. 한편, 당시 첨단 기술이었던 청동기의 제작은 전문화된 장인(匠人)의 존재를 보여주기도 한다. 위세품 제작 위주의 수공(手工) 전문화는 청동기뿐만 아니라, 진주 대평리 유적의 예처럼, 옥(玉) 생산 등에도 진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가 현저하지도 않고 비실용구로 역할을 하게 되면서 농경, 수렵, 벌채(伐採), 수확, 식료 가공, 도구 제작 등 일상의 다양한 생산 및 가사 활동은 석기로 충족된다. 도끼나 괭이의 일부를 제외하면, 석제 도구는 마연을 통해 완성된다. 간 돌살촉, 간 돌검 등은 대표적인 수렵·무구이지만 돌살촉의 일부 형식이나 대부분의 돌검은 실용성을 전제로 제작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돌검은 대다수가 무덤에서 발견될 뿐만 아니라, 두께가 얇고 과도하게 길거나 손잡이 부분이 과장되기 때문이다. 역시 수렵·무구로 분류되는 달도끼(環狀石斧), 별도끼(星形石斧)도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더 극명한 사례는 장식 돌검(裝飾石劍)인데, 동검을 모방함으로써 희소한 청동을 대체하는 상징 의례구로서의 기능을 상정해 볼 수 있다. 벌채나 목공의 도구로는 조갯날 돌도끼(蛤刃石斧), 홈자귀(有溝石斧), 턱자귀(有段石斧), 돌대팻날(扁平片刃石斧), 돌끌(石鑿) 등이 있다. 갈판(碾石)과 갈돌(磨石), 자그마한 손칼(小形石劍), ‘ᄀ’자 돌칼(東北型石刀) 등은 중요한 식료 가공구로, 다양한 형태의 반달 돌칼이나 돌낫(石鎌)은 수확구로 활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외에 가락바퀴, 그물추 등도 청동기 시대 주요 생산 도구의 일부이다.
석기와는 달리, 유기물질의 보존에 적합하지 않은 우리나라 토양 조건 탓에 목제(木製) 도구의 발견 사례는 많지 않다. 그렇다고 목기(木器)가 생산에서 가지는 역할을 간과할 수는 없다. 화살대나 도끼·자귀의 손잡이 등이 나무로 제작되었을 것임은 물론, 여타 많은 도구도 목제였을 것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실제로 괭이, 고무래, 공이 등의 목기가 확인된다. 보존 조건이 열악한 만큼 목제 도구상을 전반적으로 복원하기는 어렵지만, 목공구로 활용되었을 석기의 비율 변화를 통해 청동기 시대 생산 양상의 일면을 추정할 수는 있다. 특히 목제가 주로 활용되었을 논농사의 확산은 홈자귀, 턱자귀, 대팻날 등 석제 목공구 비율의 실질적이고 유의한 증가로 추정이 가능하다. 석제 도구 조합상의 변화로 보건대, 송국리 유형의 물질 문화가 확산되는 기원전 9~8세기 즈음 논농사(水稻作)가 남한 전역으로 확산됨을 상정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정황은 논산 마전리, 울산 무거동 옥현, 진주 평거동 등지의 논 구획 및 도수(導水)·저수 시설, 곳곳에서 확인되는 탄화미(炭化米), 식물 규산체 등 좀 더 직접적인 증거로 방증되기도 한다.
탄화 곡물 자료로 보건대, 보리, 밀, 조, 기장, 들깨 등도 재배되어 상당한 비중으로 식생활에 활용되었으며 그 대부분은 밭에서 재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주 대평리 옥방, 진안 모정리 여의곡 등지에서 보듯, 청동기 시대 밭은 대체로 자연 제방 위에 고랑과 이랑을 교차시켜 조성된다. 곡물 외에 수십 종의 야생 식물도 식료로 이용된다. 작물의 재배가 활발한 반면, 개를 제외하면 동물 사육의 적극적인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다만, 함정이나 사냥을 통한 야생 동물도 어느 정도 단백질원으로 일익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은 가능하다.
논농사의 확산과 궤를 같이 하며, 인구가 집중된 중핵(中核) 취락에서는 의례 활동을 수행하는 시설이 축조되기도 한다. 기둥 구멍을 통해 상정되는 의례용 건물은 부여 송국리, 보령 관창리, 사천 이금동 등 유적에서 보듯, 일반 주거와는 달리 규모도 크고 형태도 특이하다. 일부 고상 건물의 기둥 구멍 배치는 일본 야요이 시대 이케가미소네 유적의 신전이나 인도네시아의 통코난(tongkonan) 등 신성성이 강조된 건물을 연상케 한다. 취락 내부에 의례 건물이 갖춰짐으로써 의례 행위가 상시적이고 자유롭게 수행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논농사라는 집약화된 생산 방식에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고 그 노고를 위무(慰撫)하기 위한 노동연(勞動宴)은 그러한 의례 행위의 한 축이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의례 건물지가 발견되는 중핵 취락 유적에서는 장식·방수성이 부각되는 배식기(配食器) 위주인 붉은 간 토기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 빈번했던 의례 및 연회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내촌(內村)의 의례에 더하여 전통적인 야외 의례도 활발하게 행해졌을 듯하다. 청동기 시대 바위그림은 해당 지점을 장소화(場所化)하고 (정기적) 의례를 수행하는 기제이다. 고인돌의 덮개돌(上石), 선돌, 기타 석재 등이 아니라, 독립적인 자연 암벽에 조각된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울산 반구대 바위그림처럼 여러 시대의 도안을 포함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청동기 시대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고인돌의 축조와 관련된 의식(儀式), 동원된 인력의 노고에 대한 위무 행위, 재방문과 정기적 의례는 바위그림의 경우보다 더 현저하며, 광범위한 청동기 시대 야외 의례의 사례가 된다. 고인돌은 함경북도 일부를 제외한 한반도 전체에 분포하는데, 전근대기까지 오만여 기가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압도적 숫자나 큰 돌(巨石)의 현시성과 내구성을 바탕으로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경관을 형성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위적 구조물이 되었던 것이다.
고인돌에서 보듯이, 돌 소재의 시설을 갖춘 매장 관행의 확산은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이른 시기부터 움무덤 또는 널무덤(土壙木棺墓)이 나타나지만, 무덤방이나 부가 시설에 돌을 활용하는 무덤 양식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개별 고인돌은 무덤방의 위치에 따라, 탁자식(卓子式), 바둑판식(碁盤式), 덮개식(蓋石式), 돌 두름식(圍石式)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덮개식이 가장 흔하면서도 널리 분포하는데, 북한의 ‘묵방형(墨房型)’, 중국 동북 지방의 ‘대개석묘(大蓋石墓)’도 이 형식에 속한다. 몇 형식은 지역적 편중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분포를 엄정하게 구분할 수는 없어 ‘북방식(北方式)’과 ‘남방식(南方式)’이라는 명칭의 유효성이 지속되기는 어렵지만, 대략 충청도 중부를 경계로 탁자식은 북쪽에, 바둑판식은 남쪽에 주로 분포하는 경향은 인정된다. 북한에서 ‘오덕형(五德型)’, 중국 동북 지방에서 ‘석붕(石棚)’ 등 탁자식이 우세한 것은 그런 경향을 반영한다.
돌널무덤(石棺墓)은 시베리아에서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지역에서 청동기 시대 시작부터 널리 발견되는 무덤 양식이지만 한반도 중·남부에서는 송국리 유형 물질 문화의 확산과 궤를 같이 한다. 그에 더하여 돌뚜껑움무덤(石蓋土壙墓), 독무덤(甕棺墓) 등과 한 묘역 내에서 같이 축조된 사례가 적지 않은 점도 주목된다.
무덤 부가 시설로서 돌무지(積石·cairn) 또한 세계 거석 분묘 전통의 중요한 요소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부터 활용된다. 중국 동북 지방의 돌무지(복합)무덤(積石複合墓)이나 한반도 중·남부의 묘역식(墓域式) 고인돌, 돌무지널무덤(積石木棺墓)은 그런 맥락 속에 있다. 한편 돌무지가 부가된 묘제는 매장 전통의 지역 간 차이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반도의 매장 전통은 주로 단독장(單獨葬)이 위주이지만, 다롄 퉈터우(砣頭), 강상(崗上) 등 돌무지 묘역(墓域)의 예처럼 랴오둥 반도 일대에서는 다인장(多人葬)이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한편, 그러한 돌무지 묘역의 개별 무덤에 묻힌 여러 사람들 간 관계에 대한 해석은 청동기 시대, 특히 고조선 사회의 성격 규정에 주요 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북한 고고학에서는 1950년대 한국 고대 사회에 대한 사회 구성체 논쟁을 통해 고조선이 노예 소유자 사회, 곧 고대 국가로 규정된 이래 서북한 청동기 시대 유적 상당 부분은 선사 시대에서 분리된다. 더 나아가 오늘 날에는 고조선이 ‘단계’로 확대되어, 영역 밖의 유적도 포괄함으로써 북한 고고학에서 청동기 시대는 현저하게 축소된다. 반면, 남한 고고학은 청동기 시대 전체가 선사 시대에 속하는 데에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차이는 중국 동북지방~한반도 북부와 한반도 중·남부 사이에 사회 발달 단계상 적지 않은 시차가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중·남부에서도 광역적 취락 연결망의 핵심을 이루는 대규모 취락의 등장, 위세품을 부장하는 유력층 분묘의 등장과 매장 행위의 차별화, 집약적인 생계자원 생산 체제의 확산 등 역동적인 사회 변화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기원전 2세기 중엽, 당진 소소리, 부여 합송리, 장수 남양리 등 청동기와 주조 철기가 함께 부장되는 분묘가 한반도 중·남부에 등장하면서 청동기 시대는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신분과 철기 부장량의 상관성이 강한 완주 갈산리 신풍 유적에서 보듯, 철기 제작이라는 첨단 기술은 당시 한반도 중·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삼한 사회의 유력 계층으로부터 적극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러한 적극적 수용에 힘입어, 철기 문화는 덧띠 토기 문화와 결합하면서 한반도 남부에서 다음 시기의 주류 문화를 배태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광주 신창동, 사천 늑도 등 생활·매장·생산·교류의 복합 유적이 남해안 지역 거점으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