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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사전 | ckid=costume1185 | 삽도= | 표제=가락바퀴 | 한자= | 음역=Ga-rakba-qui | 영문=A tool used to spin thread | 분류=직물 | 성별=기타 | 시대=부족연맹국가 | 연령=성인 | 신분=서민 | krfUrl=http://www.dic-costumekorea.org/meta/?act=detail&meta_uid=11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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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 솜이나 털 따위의 섬유를 꼬아 실을 만드는 데 쓰이는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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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왕비와 왕세자빈이 국속의 적의를 입을 때 적관을 대신하여 사용하는 체발 형태의 머리 양식
* A tool used to spin thread also called bangchucha
 
  
 
===해설===
 
===해설===
가락바퀴는 가락이라는 가늘고 긴 막대 축에 끼워 그 회전을 돕는 둥근 모양의 바퀴로 방추차(紡錘車)라고도 한다. 섬유를 꼬아 실을 만드는 방적기구로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중앙의 둥근 구멍에 축이 될 막대를 넣어 고정시키고 막대 위 끝에는 갈퀴를 만들어 실을 걸어 꼬임을 줄 있게 한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골재·토재·석재 재료가 다양하며 반구형·원기둥형 등 형태도 다양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5000년경의 신석기 유적지인 궁산리 유적에서 가락바퀴와 마실(麻絲)이 끼어있는 바늘이 출토되었고, 서포항 유적지 곽가촌 유적지에서도 다량의 가락바퀴가 출토되었다. 특히 청동기시대 이후의 것은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어 사람들이 이 가락바퀴를 사용하여 삼[麻]이나 누에고치에서 섬유를 뽑아 직물을 짰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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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는 왕이 새로 등극하면 명의 제후국으로서 왕위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명나라 황제의 공식적인 책봉을 받는 절차를 거쳤는데, 이 때 왕을 책봉하는 고명과 함께 면복, 채폐 등의 예물을 반사받았다. 왕비는 왕의 면복에 상응하는 예물로써 관복을 사여받았는데, 이중 관에 해당하는 것이 주취칠적관이다. 명나라 멸망 이후인 1645년(인조23) 봉림대군 부인의 세자빈 책봉례를 치루기 위해 적관에 대해 논의한 인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적관은 재료를 구하기 어렵고 제작할 수 있는 장인 또한 없기 때문에 조선에서 적관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적관을 대체할 있는 관을 마련하여야했다. 이에 조선초기부터 사용되었던 국속제의 체발형의 머리양식을 사용하였으며, 점차 변화하여 대수 형태의 수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가례 시 착용하였던 대수는 체발을 이용한 가체 위에 장잠, 선봉잠, 후봉잠, 떨잠, 용잠, 진주동곳, 대요반자, 마리사기 다양한 수식품으로 장식하였으며, 이는 『궁중발기』의 '수식칠보'에 나타난다. 또한 1922년 영친왕비가 착용하였던 대수의 사진과 유물이 남아있어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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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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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원, 2008, 「조선시대 궁중 예관에 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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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선희, 2019, 「조선시대 궁중 대례용(大禮用) 수식(首飾) 제도의 성립과 변천」, 이화여자대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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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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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관련항목===
* [[복식사전:중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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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식사전: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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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식사전:적의]]
* [[복식사전: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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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9일 (화) 09:47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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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大首
Queen.png
ckid costume0697
한글 대수
한자 大首
영문(음역) Daesu
영문(의미) Queen’s ceremonial hair style
분류 머리모양
성별
시대 조선
연령 성인
신분 왕족
데이터 소스:
☞ 한국연구재단 한국복식사전 【대수】



정의

  • 조선후기 왕비와 왕세자빈이 국속의 적의를 입을 때 적관을 대신하여 사용하는 체발 형태의 머리 양식

해설

조선에서는 왕이 새로 등극하면 명의 제후국으로서 왕위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명나라 황제의 공식적인 책봉을 받는 절차를 거쳤는데, 이 때 왕을 책봉하는 고명과 함께 면복, 채폐 등의 예물을 반사받았다. 왕비는 왕의 면복에 상응하는 예물로써 관복을 사여받았는데, 이중 관에 해당하는 것이 주취칠적관이다. 명나라 멸망 이후인 1645년(인조23) 봉림대군 부인의 세자빈 책봉례를 치루기 위해 적관에 대해 논의한 인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적관은 재료를 구하기 어렵고 제작할 수 있는 장인 또한 없기 때문에 조선에서 적관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적관을 대체할 수 있는 관을 마련하여야했다. 이에 조선초기부터 사용되었던 국속제의 체발형의 머리양식을 사용하였으며, 점차 변화하여 대수 형태의 수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가례 시 착용하였던 대수는 체발을 이용한 가체 위에 장잠, 선봉잠, 후봉잠, 떨잠, 용잠, 진주동곳, 대요반자, 마리사기 등 다양한 수식품으로 장식하였으며, 이는 『궁중발기』의 '수식칠보'에 나타난다. 또한 1922년 영친왕비가 착용하였던 대수의 사진과 유물이 남아있어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지원, 2008, 「조선시대 궁중 예관에 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 오선희, 2019, 「조선시대 궁중 대례용(大禮用) 수식(首飾) 제도의 성립과 변천」, 이화여자대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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