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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19일 (금) 16:27 판


함양백룡성선사화과원유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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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백룡성선사 화과원 유허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함양백룡성선사화과원유허지
영문명칭 0
한자 咸陽白龍城禪師華果院遺墟址
주소 경남 함양군 백전면 리 백운리 50
지정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229호
지정일 2000년 8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
수량/면적 13709
웹사이트 함양 백룡성선사 화과원 유허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곳은 백용성(白龍城, 1864~1940) 선사(禪師)가 ‘선농일치(先農一致)’에 의한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제창한 곳이다. 전라북도 남원(남원)에서 출생한 선사는 어릴 때 부처로부터 법(法)을 받는 꿈을 꾼 뒤, 16세 때 해인사 극락암(極樂庵)으로 출가하였다. 선사는 불교 경전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3·1운동 때에는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33인의 민족 대표로 참여하였다. 3·1운동으로 인해 3년간의 옥살이를 한 선사는 출옥 후, 서울 대각사(大覺寺)에서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하여 새로운 불교 운동과 국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7년에 이곳에 화과원(華果院)을 세우고 선농불교를 전파하였다. 화과원은 사원의 경제 자립을 세우고 스님들 스스로가 농사를 지으면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선사는 이곳을 거점으로 독립군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선사는 76새애 입적(入寂)하였는데, 치아에서 금색 사리(舍利) 1과(果)가 나왔다고 한다. 그의 사리탑은 해인사 용탑선원(龍塔禪院) 옆에 서 있다. 선사의 법명(法名)은 진종(震鍾)이고 용성(龍城)은 법호(法號)이다. 현재 이곳에는 법당, 선방 등 9기소의 건물 터가 보존되어 있으며, 당시에 심었던 배나무, 밤나무, 감나무 등이 아직도 남아있다

수정 국문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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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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