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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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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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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사는 832년(신라 흥덕왕 7)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신라를 침략하던 왜적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자, 왕이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세운 절이라고 전한다. 대웅전 앞에 자리 잡은 이 탑은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옮겨와 세웠다고 하는데, 어디에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원래는 2중 받침대[二重基壇]를 갖춘 5층이었지만 지금은 4층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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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침대 중에서 아래받침의 일부는 흙 속에 묻혀 있다. 여러 장의 돌로 짜 맞춘 하층 받침대의 갑석(甲石) 윗면에는 비교적 넓게 2단으로 중간 받침을 새겨서 상층 받침돌을 받치고 있다. 몸체[塔身]는 정면에서 볼 때 위가 좁은 사다리꼴로 만들어져, 네 개의 몸체가 마치 긴 사다리꼴의 돌을 잘라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석탑이 위로 치솟는 듯한 느낌을 줌과 동시에 안정감을 줄 수 있도록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지붕돌[屋蓋石]도 첫 층의 것은 비교적 얇은 데 비해 위로 올라 갈수록 두툼하게 만들었고, 처마 끝부분을 살짝 들어 올렸다. 꼭대기 부분[上部]은 장식을 받치는 받침대[露盤]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이 석탑은 양식이나 기법으로 보아 고려 후기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전체적으로 안정감보다는 가늘고 긴 느낌을 준다. 탑신을 사다리꼴로 처리한 특이한 형태의 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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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탑은 부처의 사리, 즉 유골을 모신 조형물이다. 모든 탑이 진신사리를 모신 것은 아니지만,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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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층석탑은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높고 날렵한 느낌은 고려 후기 남부 지방에서 조성된 탑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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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탑은 이중 기단, 5층의 몸돌과 지붕돌, 상륜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한 쌍의 몸돌과 지붕돌과 상륜부 대부분이 결실되었다. 몸돌은 윗면이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만들어져서, 탑이 위로 솟아오르는 느낌을 주도록 했다. 지붕돌받침은 1층과 2층은 3단으로, 3층과 4층은 2단으로 조각하였다. 지붕돌의 끝은 위로 살짝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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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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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 장춘사 오층석탑”,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1,00680000,38&pageNo=1_1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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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 장춘사 오층석탑”, 디지털함안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ham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haman&dataType=99&contents_id=GC06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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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 장춘사 오층석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8842
  
  

2020년 6월 9일 (화) 09:43 판

함안 장춘사 오층석탑
함안 장춘사 오층석탑,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함안 장춘사 오층석탑
한자 咸安 長春寺 五層石塔
주소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영동리 14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8호
지정일 1974년 2월 16일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함안 장춘사 오층석탑,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장춘사는 832년(신라 흥덕왕 7)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신라를 침략하던 왜적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자, 왕이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세운 절이라고 전한다. 대웅전 앞에 자리 잡은 이 탑은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옮겨와 세웠다고 하는데, 어디에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원래는 2중 받침대[二重基壇]를 갖춘 5층이었지만 지금은 4층만 남아 있다.

받침대 중에서 아래받침의 일부는 흙 속에 묻혀 있다. 여러 장의 돌로 짜 맞춘 하층 받침대의 갑석(甲石) 윗면에는 비교적 넓게 2단으로 중간 받침을 새겨서 상층 받침돌을 받치고 있다. 몸체[塔身]는 정면에서 볼 때 위가 좁은 사다리꼴로 만들어져, 네 개의 몸체가 마치 긴 사다리꼴의 돌을 잘라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석탑이 위로 치솟는 듯한 느낌을 줌과 동시에 안정감을 줄 수 있도록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지붕돌[屋蓋石]도 첫 층의 것은 비교적 얇은 데 비해 위로 올라 갈수록 두툼하게 만들었고, 처마 끝부분을 살짝 들어 올렸다. 꼭대기 부분[上部]은 장식을 받치는 받침대[露盤]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이 석탑은 양식이나 기법으로 보아 고려 후기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전체적으로 안정감보다는 가늘고 긴 느낌을 준다. 탑신을 사다리꼴로 처리한 특이한 형태의 탑이라고 할 수 있다.

수정 국문

초고

불탑은 부처의 사리, 즉 유골을 모신 조형물이다. 모든 탑이 진신사리를 모신 것은 아니지만,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된다.

이 오층석탑은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높고 날렵한 느낌은 고려 후기 남부 지방에서 조성된 탑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원래 이 탑은 이중 기단, 5층의 몸돌과 지붕돌, 상륜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한 쌍의 몸돌과 지붕돌과 상륜부 대부분이 결실되었다. 몸돌은 윗면이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만들어져서, 탑이 위로 솟아오르는 느낌을 주도록 했다. 지붕돌받침은 1층과 2층은 3단으로, 3층과 4층은 2단으로 조각하였다. 지붕돌의 끝은 위로 살짝 들어 올렸다.

자문의견

2차 수정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