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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祠宇)는 선조(先祖)·선현(先賢)의 신주(神主) 혹은 영정을 모셔두고 배향하는 사당이다. 노성면 병사리에 위치한 충헌공 윤전 사우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윤전(1575~1637)의 위패를 모신 사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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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전의 사우는 《순조실록》 7년(1807) 3월 25일 기사에 따르면 유생들의 상소로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사람들은 모두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부조를 허락해야 한다”는 중론에 따라 부조묘(不祧廟)* 형식으로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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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후손들이 살았던 부여군 초촌지역에 건립되었으나 1920년대 초반 윤전의 처 해평윤씨와 아들 윤원거(1601~1672)의 묘가 있는 유평리에 사당과 종가를 마련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새로 옮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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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전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광해군 2년(1610)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615년 호조좌랑에 이르렀으나 이위경 등 대북파(大北派)에게 몰려 파면되었다. 인조반정으로 복직하여 경기도도사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는 공주에 피신한 인조를 호위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자빈·대군·원손을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가 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후 1702년(숙종 28)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충헌(忠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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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묘 :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따라서 불천지위가 된 대상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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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자체 제공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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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산백과 ’윤전’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3298&cid=40942&categoryId=33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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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조묘’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77631&cid=46635&categoryId=46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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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토문화전자대전 ‘충헌공 윤전 사우’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581233&cid=51898&categoryId=54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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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충헌공 윤전 사우’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2830000,34&pageNo=1_1_1_0
  
  

2021년 4월 23일 (금) 13:17 판


충헌공 윤전 사우
충헌공 윤전 사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충헌공 윤전 사우
한자 忠憲公 尹栓 祠宇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 333번지
지정번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83호
지정일 1986년 11월 19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충헌공 윤전 사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윤전(1575~1637)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윤전은 이괄의 난(1624)때 공주로 피신한 인조를 호종(扈從)하였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왕세자의 교육기관)의 필선(弼善)이셨던 선생은 세자빈‧대군‧원손 등을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가 적과 대항하다가 절사(節死)하셨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헌(忠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원래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있던 사당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수정 국문

초고

사우(祠宇)는 선조(先祖)·선현(先賢)의 신주(神主) 혹은 영정을 모셔두고 배향하는 사당이다. 노성면 병사리에 위치한 충헌공 윤전 사우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윤전(1575~1637)의 위패를 모신 사우이다.

윤전의 사우는 《순조실록》 7년(1807) 3월 25일 기사에 따르면 유생들의 상소로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사람들은 모두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부조를 허락해야 한다”는 중론에 따라 부조묘(不祧廟)* 형식으로 건립되었다.

본래 후손들이 살았던 부여군 초촌지역에 건립되었으나 1920년대 초반 윤전의 처 해평윤씨와 아들 윤원거(1601~1672)의 묘가 있는 유평리에 사당과 종가를 마련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새로 옮겨진 것이다.

윤전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광해군 2년(1610)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615년 호조좌랑에 이르렀으나 이위경 등 대북파(大北派)에게 몰려 파면되었다. 인조반정으로 복직하여 경기도도사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는 공주에 피신한 인조를 호위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자빈·대군·원손을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가 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후 1702년(숙종 28)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충헌(忠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부조묘 :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따라서 불천지위가 된 대상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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