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중

청주 청주한씨 시조제단비

HeritageWiki
이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9월 7일 (화) 00:57 판 (새 문서: {{진행중}} {{문화유산정보 |사진=청주청주한씨시조제단비.jpg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301690000 청주 청...)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청주 청주한씨 시조제단비
청주 청주한씨 시조제단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청주 청주한씨 시조제단비
한자 淸州 淸州韓氏 始祖祭壇碑
주소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운동로129번길 4-18 (운동동)
지정번호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지정일 1990년 12월 14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청주 청주한씨 시조제단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청주 한씨 시조인 한란(韓蘭 853∼916)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으로, 청주한씨유기서사비(淸州韓氏遺基敍事碑)라고도 한다.

후삼국시대 청주의 호족이었던 한란은 매년 수 만석을 추수하던 부농이었다. 어느 날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청주를 지날 때 십만 대군을 위한 군량미를 제공하는 등의 공을 세워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이 비석은 1605년(선조38) 청주목사 겸 청주병마절제사(淸州兵馬節制使)였던 한백겸(韓百謙)이 자신의 시조인 한란의 유적을 고증하여 찾은 후, 그곳에 제단을 쌓고 세운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그의 동생인 한준겸(韓浚謙)이 쓴 것으로, 시조의 내력을 상세히 서술하여 모든 후손들이 제사 때마다 읽고 알 수 있도록 하였다.

17세기 역사지리학의 대가이며 후손인 한백겸에 의해 시조의 옛 터가 고증되어 세운 비석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청주 한씨 시조인 한란(853-?)을 기리기 위해 1605년에 세운 것이다.

한란은 후삼국시대에 이 지역의 호족이었는데, 태조 왕건이 928년 후백제 정벌을 위해 청주를 지날 때 군량미를 지원하는 공을 세워 이후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비석은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올리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은 형태이다.

한란의 후손이자 역사지리학자였던 한백겸(1550-1613)이 청주 지역의 관리로 파견되었을 때, 고증을 통해 선조의 유적을 찾은 후 그 자리에 제단을 쌓은 후 함께 세웠다.

비문은 한백겸의 동생 한준겸(1557-1627)이 지었다. 비문에 시조의 내력을 상세하게 적었다고 하나, 현재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렵다.


  • 한란의 생몰년과 관련해, 고려 건국이 918년이므로 몰년이 그보다 앞선 지자체 국문은 오류가 있다고 판단하여 몰년을 미상으로 처리함.


참고자료

  • 한란, 디지털청주문화대전 http://cheongju.grandculture.net/cheongju/toc/GC00201591 928년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하기 위하여 청주를 지날 때 한란은 왕건을 군례(軍禮)로 맞이하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하루 동안 왕건의 10만 군대를 배불리 먹였으며, 왕건과 함께 종군(從軍)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한란은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 되었으며, 벼슬은 삼중대광 태위(三重大匡 太尉)에 올랐다.
  • 청주한씨시조제단비, 디지털청주문화대전 http://cheongju.grandculture.net/cheongju/toc/GC00201200 -> 사각형의 밭침돌 위에 높이 147㎝, 폭 80㎝, 두께 19㎝의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밭침돌은 흙 속에 묻힌 상태이며 비신은 서쪽으로 약간 기울었다. 비문에 따르면, 당시에 위토(位土)를 마련하는 한편 제단을 쌓고 담을 둘러 경계를 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