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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800050000&pageNo=1_1_1_1 -> 기본 내용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800050000&pageNo=1_1_1_1 -> 기본 내용
 
*창열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5413-> 배향인물 39인 목록.
 
*창열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5413-> 배향인물 39인 목록.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 창렬사, 쏠쏠한 일상,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cjkks&logNo=70111926164&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정사호가 ‘1595년’ 건립했다는 설명 있으나 오류임 ; 정사호는 1607년 경상감사로 제수되었음(조선왕조실록 기사 - http://sillok.history.go.kr/id/kna_14002022_001 확인) / 1712년 최진한(1652-1740)이 중수했다. ; 이 내용은 맞는 듯하나 확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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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 창렬사, 쏠쏠한 일상,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cjkks&logNo=70111926164&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정사호가 ‘1595년’ 건립했다는 설명 있으나 오류임 ; 정사호는 1607년 경상감사로 제수되었음(조선왕조실록 기사 - http://sillok.history.go.kr/id/kna_14002022_001 확인) / 1712년 최진한(1652-1740)이 중수했다. ; 이 내용도 오류인 듯. 조선왕조실록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ta_10102004_001)에서는 1721년에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었다고 함.)
 
*창렬사의 실체, 조열태의 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oultae&logNo=20158846602&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당시 진주성 성주와 부성주였던 서예원과 성수경이 배향되지 못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  
 
*창렬사의 실체, 조열태의 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oultae&logNo=20158846602&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당시 진주성 성주와 부성주였던 서예원과 성수경이 배향되지 못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  
  

2020년 11월 30일 (월) 00:47 판


진주 창열사
진주 창열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진주 창열사
한자 晉州 彰烈祠
주소 경남 진주시 남성동 212-8번지
지정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
지정일 1983년 7월 20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수량/면적 7동
웹사이트 진주 창열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창렬사는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싸움(1593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성을 지켰던 분들을 모시기 위해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하였는데 1607년(선조40)에 사액*을 받은 사당이다.

그 후 충무공 김시민을 모신 충민사가 헐리면서 충무공 김시민도 이곳에 모시게 되어 충무공 김시민을 비롯한 39위(位)를 모시고 있다.

사당은 정사(正祠), 동사(東祠), 서사(西祠), 경충당(景忠堂), 비각(碑閣) 등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 사액(賜額) : 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는 일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창열사는 임진왜란 중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순국한 이들을 기리는 사당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살아남은 47개소 중 하나이다.

1607년 경상도 지역에 관찰사로 부임했던 정사호(1553-1616)가 사액을 받아 건립했다.

이곳에는 1593년 벌어진 2차 전주성 전투에서 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은 의병장 김천일(1537-1593) 등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었다. 이후 1868년 서원 철폐령으로 괴산 충민사가 없어질 때 김시민(1554-1592) 장군의 위패도 이곳으로 옮겨왔다.

현재 총 39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린다.

경내에는 3동의 사당 건물을 비롯해 비각, 내삼문, 외삼문 등 총 7동의 건물이 있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