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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영문 해설 내용===
이 건물은 진주성으로 드나드는 문을 다락 형태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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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1618년 경상도 병마절도사 남이흥(1576-1627)이 병영의 문루로 처음 세웠다. 1895년부터는 경상도 관아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정면에 걸린 현판에 쓰인 '영남포정사'는 '경상도의 정치 행정을 살피는 곳'이라는 뜻이다.  
  
1618년 경상도 절도사로 부임했던 남이흥이 집무실의 출입문으로 처음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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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을 높이 만들어 누각 아래를 통과하여 출입할 수 있게 하였고, 누각에서는 출입자를 감시하였다. 누각 내부에는 '망미루'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데, '미'는 임금을 뜻하는 말로 '임금을 그리워하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문신이자 서예가인 서영보(1759-1816)가 글씨를 썼다.  
  
1895년 지방제도가 개편되면서 진주관찰부가 되었을 때 본청의 정문이 되었고, 1896년 경상도를 남북으로 나누면서 경상남도 관찰사 청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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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루 앞 오른쪽에 있는 비석에는 '수령 이하의 사람은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2층으로 된 이 건물은 출입문의 기능이 주가 되기 때문에 아래층의 기둥은 높고 지붕은 낮게 지었으며, 2층으로는 사다리를 이용해 오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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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2층 다락은 나무로 마루를 깔고 사방에 난간을 둘렀으며, 측면 난간 일부를 없애 사다리를 놓을 자리를 마련했다. 안쪽에는 ‘망미루’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임금을 그리워하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영남포정사(바깥쪽 현판)는 ‘영남의 정치(행정)를 살피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 문루는 과거 진주목(후대 여러차례 개편됨)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아 건물 중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문앞 오른편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2020년에 유형문화재로 승격됨 (액셀 파일 업데이트 요 / 국가문화유산포털)
 
*건물 사진에서 간혹 확인되는 건물 옆면의 판벽은 언제, 왜 설치한 것인지(지금도 있는지) 등 확인 필요함.
 
 
 
=='''참고 자료'''==
 
 
*영남포정사 문루, 디지털진주문화대전  http://jinju.grandculture.net/jinju/search/GC00401539?keyword=%EC%98%81%EB%82%A8%ED%8F%AC%EC%A0%95%EC%82%AC&page=1 -> 기본 정보 확인
 
*영남포정사 문루, 디지털진주문화대전  http://jinju.grandculture.net/jinju/search/GC00401539?keyword=%EC%98%81%EB%82%A8%ED%8F%AC%EC%A0%95%EC%82%AC&page=1 -> 기본 정보 확인
 
*(참고)진주의 옛 건축, 고영훈 지음, 알마 출판사, 2014년 pp.59-61 -> 이러한 형태의 문은 건물의 위엄을 위해 규모를 크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락으로 오르내리기 위한 계단을 두지 않는다.  
 
*(참고)진주의 옛 건축, 고영훈 지음, 알마 출판사, 2014년 pp.59-61 -> 이러한 형태의 문은 건물의 위엄을 위해 규모를 크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락으로 오르내리기 위한 계단을 두지 않는다.  

2020년 12월 18일 (금) 01:38 판


진주 영남포정사 문루
진주 영남포정사 문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진주 영남포정사 문루
한자 晉州 嶺南布政司 門樓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 (본성동, 진주성)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67호
지정일 2020년 6월 11일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조경건축 / 누정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진주 영남포정사 문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영남포정사 문루는 1618년(광해군10) 경상우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세웠다. 1895년(고종 32)에는 진주관찰부, 1896년(건양*원년)에는 경상남도 관찰사 청사의 정문으로 사용되어 영남포정사 문루라 불렀다.

누의 편액은 망미루(望美樓)인데 지중추부사 서영보(徐榮輔)의 글씨다.

출입문의 기능을 위해 누의 아래 기둥이 높게 설치되고 누는 지붕을 낮게 하여 출입자를 감시하고 외부 침입을 대비한 조선 중기 관아의 문루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망미루(望美樓)”의 미(美)는 임금을 뜻하는 말로 임금을 그리워하는 누각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 건양(建陽) : 조선 고종 때의 연호로 시기는 1896년부터 1897년까지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건물은 1618년 경상도 병마절도사 남이흥(1576-1627)이 병영의 문루로 처음 세웠다. 1895년부터는 경상도 관아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정면에 걸린 현판에 쓰인 '영남포정사'는 '경상도의 정치 행정을 살피는 곳'이라는 뜻이다.

기둥을 높이 만들어 누각 아래를 통과하여 출입할 수 있게 하였고, 누각에서는 출입자를 감시하였다. 누각 내부에는 '망미루'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데, '미'는 임금을 뜻하는 말로 '임금을 그리워하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문신이자 서예가인 서영보(1759-1816)가 글씨를 썼다.

문루 앞 오른쪽에 있는 비석에는 '수령 이하의 사람은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참고자료

  • 영남포정사 문루, 디지털진주문화대전 http://jinju.grandculture.net/jinju/search/GC00401539?keyword=%EC%98%81%EB%82%A8%ED%8F%AC%EC%A0%95%EC%82%AC&page=1 -> 기본 정보 확인
  • (참고)진주의 옛 건축, 고영훈 지음, 알마 출판사, 2014년 pp.59-61 -> 이러한 형태의 문은 건물의 위엄을 위해 규모를 크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락으로 오르내리기 위한 계단을 두지 않는다.
  • (참고) 촉석루·영남포정사 문루 ‘품격’ 올리다, 경남일보, 2020.1.28. 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4351 -> 영남포정사 문루는 1895년 고종 32년에 전국 8도제를 28부제로 시행하면서 진주부가 설영(設營 :군대가 머무는 진영)이 돼 진주 관찰부(경남도청의 모태가 된 조선 말기 도정의 최고 행정기관), 선화당(도청 본관)의 관문이 됐다. 영남포정사 문루는 경남의 수부(首府)를 상징하는 관찰사영의 정문으로 조선시대에 진주가 경남도의 중심지였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건물이며 최초에 병사 남이흥이 신축한 이후 300여 년간 자리를 지켜온 역사성도 함께 인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