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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실터(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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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실터 右室址
Goto.png 종합안내판: 남한산성



해설문

국문

남한산성에는 유사시 임금이 피난할 수 있도록 행궁을 건립하고, 그와 더불어 중국 고대 도시계획의 원칙인 좌묘우사*에 따라 좌전(左殿, 종묘)과 우실(右室, 사직)을 마련하였다.

조선 인조 4년(1626) 남한산성 행궁을 창건할 당시에는 단(壇)만 있었는데, 숙종 37년(1711) 좌전과 함께 건물을 세우고 관리인 1명을 두었다.

우실은 19세기 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2001년 남한산성 마을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배수지가 들어섰다.


  • 좌묘우사(左廟右社): 궁궐을 중심으로 곡신과 토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은 오른쪽(서쪽), 왕실 사당에 해당하는 종묘는 왼쪽(동쪽)에 두는 원칙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1711년 남한산성 행궁 서쪽에 세워진 우실이 있던 곳이다. 우실은 곡식의 신과 토지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을 말하며, 궁궐의 오른쪽(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남한산성에는 유사시 임금이 피난할 수 있도록 1626년 행궁이 건립되었다. 고대 도시계획의 원칙에 따라 궁궐의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왕실 사당인 종묘와 사직단을 두는데, 행궁 건립 당시에는 사직단만 세웠고 종묘는 1711년에 세워졌다. 사직단은 19세기 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 터에는 2001년 남한산성 마을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배수지가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