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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문신 김륵(1540-1616)이 학문을 수양하고 휴식하기 위해 1588년에 처음 지은 정자이다. 원래의 정자는 퇴락하여 무너졌고, 1752년에 다시 짓고 그 앞에 연못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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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륵은 조선의 저명한 학자인 이황(1501-1570)의 제자이며, 1576년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경상도 지방에 부임해 의병 조직을 활용해 왜적을 막는 공을 세웠다. 이후 여러 주요 관직을 지냈으며, 특히 충청도관찰사, 안동부사, 한성좌윤 등 여러 지역의 지방관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1612년 역모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누명을 쓰게 되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인 지금의 봉화군 문단리로 돌아왔다. 이후 석포리 번계마을로 이주하여 이 정자를 짓고, 평생 은거하며 만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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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는 왼쪽에 온돌방, 오른쪽에 마루를 두었고, 건물 앞쪽과 오른쪽에 난간을 둘렀다. 천운정이라는 이름은 주자(朱子)가 지은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天光雲影共排徊]’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마루에 걸린 편액은 명필로 이름난진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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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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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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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樓亭)은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 형식의 집을 말하며, 전통시대에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휴식과 학문 등을 행하던 공간이다. 누각과 정자를 함께 일컫는 명칭으로 정루(亭樓)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이름 뒤에 누(樓) · 정(亭) · 재(齋) · 암(庵) · 대(臺) 등의 명칭이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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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정은 선조 21년(1588)에 김륵(金玏)이 지은 정자이다. 김륵은 영주 시내 구학정(龜鶴亭)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번잡하다 하여 이산면 석포리 번계마을에 천운정을 짓고 만년을 보냈다. 건립 후 퇴락하여 무너진 것을 영조 28년(1752)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건하고 그 앞에 연못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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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정은 학문과 휴양을 위한 정자건축으로써 그 기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으며, 김륵이 만년을 보낸 곳으로 조선 시대 선비들의 은둔과 자연 회귀적 삶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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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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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onunjeong Pavilion, Yeongju '''
  
 
===영문 해설 내용===
 
===영문 해설 내용===
천운정은 조선시대의 문신 김륵(1540-1616)이 학문을 수양하고 휴식하며 노년을 보내기 위해 1588년에 지은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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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문신 김륵(1540-1616)이 학문을 수양하고 휴식하기 위해 1588년에 처음 지은 정자이다. 원래의 정자는 퇴락하여 무너졌고, 1752년에 다시 짓고 그 앞에 연못을 조성하였다.
 
 
김륵은 영천 출신으로 1576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경상도 지방에 부임해 의병 조직을 활용해 왜적을 막는 공을 세웠다.  
 
  
그는 1612년 옥사에 연루되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후 더이상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했는데, 영주 시내에 있는 구학정에 거처하다가 그곳이 번잡하다고 하며 석포리 번계마을에 이 정자를 짓고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
김륵은 조선의 저명한 학자인 이황(1501-1570)의 제자이며, 1576년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경상도 지방에 부임해 의병 조직을 활용해 왜적을 막는 공을 세웠다. 이후 여러 주요 관직을 지냈으며, 특히 충청도관찰사, 안동부사, 한성좌윤 등 여러 지역의 지방관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1612년 역모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누명을 쓰게 되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인 지금의 봉화군 문단리로 돌아왔다. 이후 석포리 번계마을로 이주하여 이 정자를 짓고, 평생 은거하며 만년을 보냈다.
 
건물은 175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건되었다.
 
  
왼쪽에는 온돌방을, 오른쪽에는 마루를 두고, 건물 앞쪽과 오른쪽에 난간을 둘러 누마루처럼 꾸몄다. 편액은 명필로 이름한 한호(1543-1605)의 글씨이다.
+
정자는 왼쪽에 온돌방, 오른쪽에 마루를 두었고, 건물 앞쪽과 오른쪽에 난간을 둘렀다. 천운정이라는 이름은 주자(朱子)가 지은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天光雲影共排徊]’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마루에 걸린 편액은 명필로 이름난 한호(1543-1605)의 글씨이다.
  
*담장 앞 연못이 건물 중건 당시에 조성한 것인지 확인 필요함.(현재 국문 문안 및 지자체 설명 자료는 시기를 확인할 수 없음.)
+
*정자 이름 설명은 [[천운정사]] 참고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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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영주 천운정, 디지털영주문화대전 http://yeongju.grandculture.net/yeongju/toc/GC07400455 -> 영주 천운정은 학문과 휴양을 위한 정자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평면은 2통간, 온돌방과 마루 1칸을 연이어 놓았다. 전면과 오른쪽에 계자각 헌함을 돌려 마치 누마루처럼 꾸몄다. 상부가구는 간략한 3량가이고 대들보 위에 첨차와 소로를 끼운 제형 판대공으로 마룻대를 받았다. 마루 상부에는 마룻대를 마루 복판까지 빼내 끝단에 짧은 받침목을 달동자로 결구시키고 여기에 추녀와 서까래를 결구시켰다. 천운정 앞에는 연못이 있어 매년 연꽃이 만발하게 피어난다. 정자의 오른쪽에는 김륵의 둘째 아들 번계 김지선(金止善)[1573~1622]이 건립 한 살림집인 양진재(養眞齋)가 자리 잡고 있다. /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가 쓴 「천운정(天雲亭)」 편액과 「동포서당(東浦書堂)」, 동래(東萊) 정언충(鄭彦忠)의 「중건천운정기」 현판이 남아 있다.
 
*영주 천운정, 디지털영주문화대전 http://yeongju.grandculture.net/yeongju/toc/GC07400455 -> 영주 천운정은 학문과 휴양을 위한 정자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평면은 2통간, 온돌방과 마루 1칸을 연이어 놓았다. 전면과 오른쪽에 계자각 헌함을 돌려 마치 누마루처럼 꾸몄다. 상부가구는 간략한 3량가이고 대들보 위에 첨차와 소로를 끼운 제형 판대공으로 마룻대를 받았다. 마루 상부에는 마룻대를 마루 복판까지 빼내 끝단에 짧은 받침목을 달동자로 결구시키고 여기에 추녀와 서까래를 결구시켰다. 천운정 앞에는 연못이 있어 매년 연꽃이 만발하게 피어난다. 정자의 오른쪽에는 김륵의 둘째 아들 번계 김지선(金止善)[1573~1622]이 건립 한 살림집인 양진재(養眞齋)가 자리 잡고 있다. /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가 쓴 「천운정(天雲亭)」 편액과 「동포서당(東浦書堂)」, 동래(東萊) 정언충(鄭彦忠)의 「중건천운정기」 현판이 남아 있다.
 
*연못 속에 비친 정자 천운정, 힐링중심 행복영주 영주시청 공식블로그 https://m.blog.naver.com/yeongju_city/221949754201
 
*연못 속에 비친 정자 천운정, 힐링중심 행복영주 영주시청 공식블로그 https://m.blog.naver.com/yeongju_city/221949754201

2021년 3월 27일 (토) 00:20 판


영주 천운정
Cheonunjeong Pavilion, Yeongju
영주 천운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영주 천운정
영문명칭 Cheonunjeong Pavilion, Yeongju
한자 榮州 天雲亭
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로 651-31 (이산면 석포리



영주 천운정
Cheonunjeong Pavilion, Yeongju
영주 천운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영주 천운정
영문명칭 Cheonunjeong Pavilion, Yeongju
한자 榮州 天雲亭
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로 651-31 (이산면 석포리)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57호
지정일 2009년 10월 12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영주 천운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누정(樓亭)은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 형식의 집을 말하며, 전통시대에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휴식과 학문 등을 행하던 공간이다. 누각과 정자를 함께 일컫는 명칭으로 정루(亭樓)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이름 뒤에 누(樓) · 정(亭) · 재(齋) · 암(庵) · 대(臺) 등의 명칭이 붙는다.

천운정은 선조 21년(1588)에 김륵(金玏)이 지은 정자이다. 김륵은 영주 시내 구학정(龜鶴亭)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번잡하다 하여 이산면 석포리 번계마을에 천운정을 짓고 만년을 보냈다. 건립 후 퇴락하여 무너진 것을 영조 28년(1752)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건하고 그 앞에 연못을 조성하였다.

천운정은 학문과 휴양을 위한 정자건축으로써 그 기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으며, 김륵이 만년을 보낸 곳으로 조선 시대 선비들의 은둔과 자연 회귀적 삶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영문

Cheonunjeong Pavilion, Yeongju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문신 김륵(1540-1616)이 학문을 수양하고 휴식하기 위해 1588년에 처음 지은 정자이다. 원래의 정자는 퇴락하여 무너졌고, 1752년에 다시 짓고 그 앞에 연못을 조성하였다.

김륵은 조선의 저명한 학자인 이황(1501-1570)의 제자이며, 1576년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경상도 지방에 부임해 의병 조직을 활용해 왜적을 막는 공을 세웠다. 이후 여러 주요 관직을 지냈으며, 특히 충청도관찰사, 안동부사, 한성좌윤 등 여러 지역의 지방관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1612년 역모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누명을 쓰게 되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인 지금의 봉화군 문단리로 돌아왔다. 이후 석포리 번계마을로 이주하여 이 정자를 짓고, 평생 은거하며 만년을 보냈다.

정자는 왼쪽에 온돌방, 오른쪽에 마루를 두었고, 건물 앞쪽과 오른쪽에 난간을 둘렀다. 천운정이라는 이름은 주자(朱子)가 지은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天光雲影共排徊]’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마루에 걸린 편액은 명필로 이름난진행중}}

영주 천운정
Cheonunjeong Pavilion, Yeongju
영주 천운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영주 천운정
영문명칭 Cheonunjeong Pavilion, Yeongju
한자 榮州 天雲亭
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로 651-31 (이산면 석포리



영주 천운정
Cheonunjeong Pavilion, Yeongju
영주 천운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영주 천운정
영문명칭 Cheonunjeong Pavilion, Yeongju
한자 榮州 天雲亭
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로 651-31 (이산면 석포리)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57호
지정일 2009년 10월 12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영주 천운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누정(樓亭)은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 형식의 집을 말하며, 전통시대에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휴식과 학문 등을 행하던 공간이다. 누각과 정자를 함께 일컫는 명칭으로 정루(亭樓)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이름 뒤에 누(樓) · 정(亭) · 재(齋) · 암(庵) · 대(臺) 등의 명칭이 붙는다.

천운정은 선조 21년(1588)에 김륵(金玏)이 지은 정자이다. 김륵은 영주 시내 구학정(龜鶴亭)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번잡하다 하여 이산면 석포리 번계마을에 천운정을 짓고 만년을 보냈다. 건립 후 퇴락하여 무너진 것을 영조 28년(1752)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건하고 그 앞에 연못을 조성하였다.

천운정은 학문과 휴양을 위한 정자건축으로써 그 기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으며, 김륵이 만년을 보낸 곳으로 조선 시대 선비들의 은둔과 자연 회귀적 삶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영문

Cheonunjeong Pavilion, Yeongju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문신 김륵(1540-1616)이 학문을 수양하고 휴식하기 위해 1588년에 처음 지은 정자이다. 원래의 정자는 퇴락하여 무너졌고, 1752년에 다시 짓고 그 앞에 연못을 조성하였다.

김륵은 조선의 저명한 학자인 이황(1501-1570)의 제자이며, 1576년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경상도 지방에 부임해 의병 조직을 활용해 왜적을 막는 공을 세웠다. 이후 여러 주요 관직을 지냈으며, 특히 충청도관찰사, 안동부사, 한성좌윤 등 여러 지역의 지방관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1612년 역모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누명을 쓰게 되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인 지금의 봉화군 문단리로 돌아왔다. 이후 석포리 번계마을로 이주하여 이 정자를 짓고, 평생 은거하며 만년을 보냈다.

정자는 왼쪽에 온돌방, 오른쪽에 마루를 두었고, 건물 앞쪽과 오른쪽에 난간을 둘렀다. 천운정이라는 이름은 주자(朱子)가 지은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天光雲影共排徊]’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마루에 걸린 편액은 명필로 이름난 한호(1543-1605)의 글씨이다.

참고자료

  • 영주 천운정, 디지털영주문화대전 http://yeongju.grandculture.net/yeongju/toc/GC07400455 -> 영주 천운정은 학문과 휴양을 위한 정자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평면은 2통간, 온돌방과 마루 1칸을 연이어 놓았다. 전면과 오른쪽에 계자각 헌함을 돌려 마치 누마루처럼 꾸몄다. 상부가구는 간략한 3량가이고 대들보 위에 첨차와 소로를 끼운 제형 판대공으로 마룻대를 받았다. 마루 상부에는 마룻대를 마루 복판까지 빼내 끝단에 짧은 받침목을 달동자로 결구시키고 여기에 추녀와 서까래를 결구시켰다. 천운정 앞에는 연못이 있어 매년 연꽃이 만발하게 피어난다. 정자의 오른쪽에는 김륵의 둘째 아들 번계 김지선(金止善)[1573~1622]이 건립 한 살림집인 양진재(養眞齋)가 자리 잡고 있다. /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가 쓴 「천운정(天雲亭)」 편액과 「동포서당(東浦書堂)」, 동래(東萊) 정언충(鄭彦忠)의 「중건천운정기」 현판이 남아 있다.
  • 연못 속에 비친 정자 천운정, 힐링중심 행복영주 영주시청 공식블로그 https://m.blog.naver.com/yeongju_city/221949754201
  • 김륵, 디지털영주문화대전 http://yeongju.grandculture.net/yeongju/toc/GC074005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