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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1년 전쟁으로 사찰 전체가 불탔다가 944년에 다시 세웠으나 계속되는 재해로 언제 절이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현재 흥녕선원지 자리에는 법흥사가 있다.  
 
891년 전쟁으로 사찰 전체가 불탔다가 944년에 다시 세웠으나 계속되는 재해로 언제 절이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현재 흥녕선원지 자리에는 법흥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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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녕선원지에서 남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곳에 있는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을 비롯하여 영월에 있는 주천 삼층석탑, 무릉리의 삼층석탑봐 마애여래좌상 등은 흥녕선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안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로 보아 흥녕선원이 번성할 당시의 규모가 매우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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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절이 크게 번성할 당시 흥녕선원 규모를 짐작할 만한 석탑이 남아 있는데, 충북 제천 장락동 칠층돌벽돌탑, 주천 삼층석탑, 무릉리 삼층석탑이다. 이 석탑들은 요선정 옆에 있는 마애여래좌상과 함께 흥녕선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안내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한다.
 
  
  

2024년 4월 21일 (일) 10:14 판


영월 흥녕선원지
대표명칭 영월 흥녕선원지
한자 寧越 興寧禪院址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무릉법흥로 1352 (법흥사)
지정번호 강원도 기념물 제6호
지정일 1971년 12월 16일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사찰
시대 고려시대
수량/면적 11,045㎡
웹사이트 영월 흥녕선원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통일신라 말기 구산선문* 가운데 사자산파의 본거지인 흥녕선원의 옛터다. 사자산파의 개산조(절이나 종파를 새로 연 승려)는 철감선사 도윤이라 전하지만, 실제 사자산문을 개창한 이는 그의 제자인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이다.

진성여왕 5년(891)에 전쟁으로 사찰이 불탔으며, 혜종 1년(943)에 다시 세웠으나 계속되는 재해로 언제 절이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절이 크게 번성할 당시 흥녕선원 규모를 짐작할 만한 석탑이 남아 있는데, 충북 제천 장락동 칠층돌벽돌탑, 주천 삼층석탑, 무릉리 삼층석탑이다. 이 석탑들은 요선정 옆에 있는 마애여래좌상과 함께 흥녕선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안내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한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흥녕선원은 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하였으며, 신라 말 고려 초에 형성된 한국 선종의 9개 산문 중 하나인 사자산문의 본거지이다. 사자산문을 개창한 것은 철감선사 도윤(798-868)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의 제자인 징효대사 절중(826-900)이 사자산문을 열며 그 정신이 스승에게서 왔음을 천명하였다.

891년 전쟁으로 사찰 전체가 불탔다가 944년에 다시 세웠으나 계속되는 재해로 언제 절이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현재 흥녕선원지 자리에는 법흥사가 있다.

흥녕선원지에서 남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곳에 있는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을 비롯하여 영월에 있는 주천 삼층석탑, 무릉리의 삼층석탑봐 마애여래좌상 등은 흥녕선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안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로 보아 흥녕선원이 번성할 당시의 규모가 매우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