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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송파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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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송파재사
안동권씨 송파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안동권씨 송파재사
한자 安東權氏 松坡齋舍
주소 경북 안동시 서후면 교리향교길 31 (교리)
지정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6호
지정일 2001년 11월 1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廓
웹사이트 안동권씨 송파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2016

안동권씨 복야공(僕射公) 묘단(墓壇)과 판서공파의 파조(派祖)인 권인(權靷)의 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1743년(영조 19)에 8칸의 기와집으로 창건하였다가 1746년(영조 22)과 1748년(영조 24)에 증축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을 유지해 오고 있다.

이 재사는 대문채의 양 끝이 몸채보다 한 칸씩 튀어나온 ‘口’자형 건물이다. 특히 대청과 서재에 설치된 창호는 건축 연대를 가늠 할 수 있는 귀한 형식이다. 1748년 중건 당시의 평면구성과 양식에 큰 변화 없이 옛 양식을 잘 보전하고 있으며, 특이한 창호유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2022 초고

이 건물은 안동권씨 중시조인 10대손 권수홍(權守洪)의 묘단과 파조(派祖)인 15대손 권인(權靷)의 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권인은 고려 공민왕 23년(1374) 과거에 급제했으며, 고려가 망한 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온 후 은거하며 절의를 지켰다고 한다.

조선 영조 19년(1743)에 기와집을 매입해 사용하다가, 영조 22년(1746)에 규모를 늘려 짓고, 영조 24년(1748)에 다시 고쳐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건물은 몸채와 좌우 날개채, 대문채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口’자형 구조로 되어 있으며, 대문채의 양 끝이 약간 돌출되어 있다.

몸채의 대청과 왼쪽 날개채에 있는 방에는 중앙에 기둥을 세운 형태의 창호가 설치되어 있는데, 건물이 지어진 연대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옛 방식이다.

비문은 권행의 후손인 권시(權諰, 1604~1672)가 지었고, 전서(篆書)는 조선시대의 학자로 예학(禮學)에 특히 밝았던 허목(許穆, 1595~1682)이, 글씨는 안동 권씨를 외가로 두었던 이경휘(李慶徽, 1617~1669)가 썼다.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1971년에 세운 것이다.

  • 안동권씨는 시조 권행(權幸)​이 성을 하사받은 후 10대에 이르어 15개의 파로 나뉘게 된다. 권수홍은 고려 때 상서좌복야 상장군(尙書左僕射 上將軍)이라는 벼슬을 역임해 그의 후손들은 ‘복야공파’가 되었다. 권인은 권수홍의 둘째 손자인 권윤평(權允平)의 증손자로,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판서공파’ 권인을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들은 풍산읍 노리에 세거하였다.
  • 재사 오른편에 권인의 신도비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신도비각이 있다. 신도비는 18대손인 권상규(權相圭, 1874~1961)가 세웠다고 한다. (다음 블로그 참조)
  • 영쌍창(靈雙窓)은 창호 중간에 기둥[설주]을 두어 창문이 두 개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18세기 이전의 건축에서 보이는 고식(古式)이다.
  • 송파재사의 동쪽 방향에 권수홍의 설단과 권인의 묘가 있다.

2022 1차 수정

영문

This is a ritual house for preparing ceremonial rituals and maintaining the tomb of Gwon In, the founder of the Panseogong Branch of the Andong Gwon Clan, and the tomb altar of Gwon Su-hong, the 5th-generation ancestor of Gwon In.

The ritual house was first built in 1743, and was expanded twice in 1746 and 1748 to its present appearance. The gate quarters in front of the main quarters has a wing at each side, and the overall floor plan and architectural style of the entire building have been well-preserved since their modifications in 1748. The windows in the wooden-floored hall and the western quarters have a post at the center of their frame, and this unique style was popularly used during the 17th and 18th century.


참고자료

  • 안동권씨 송파재사,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853 -> 1743년(영조 19) 8칸 와가를 매입하여 안동권씨 송파재사로 사용해 오다가 협소하여 1746년(영조 22) 초가 4칸을 증축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흡족하지 않자 1748년(영조 24) 다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고쳐 지었다. / 안동권씨 송파재사는 맨 앞쪽 대문채의 양 끝이 한 칸씩 돌출되어 있는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대문에 들어서면 가운데 자리한 마당을 중심으로 좌측과 우측에 각기 좌익사(左翼舍)와 우익사(右翼舍)가 배치되어 있고 건너편에 몸채가 놓여 있다. 대문채는 가운데 칸에 대문을 내고 그 좌측으로 온돌방·뒤주·외양간 순으로 배열하였고, 우측으로는 온돌방·광 순으로 배열하였다. 대문채의 좌측 끝과 우측 끝에 각기 외양간과 광이 1칸씩 돌출되어 있다. 몸채는 가운데에 넓은 대청이 자리하고 있다. 좌익사에는 온돌방·서재·통래간을 시설하였고, 우익사에는 온돌방·동재·부엌을 두었다.
  • 안동권씨 송파재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7235 -> 대청과 서재에는 영쌍창(欞雙窓)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건물의 건축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귀한 창호형식이다. 특히 가운데 설주는 단면 나비를 창틀 두께와 같게 하여 세운 일반형으로, 위쪽은 제비초리맞춤을, 아래쪽은 맞댄맞춤을 베풀고 실내 쪽은 모접기했다. 좌익사 서재의 배면 두 개구부에도 띠살영쌍창이 설치되어 있는데, 두 영쌍창의 가운데 설주는 대청 것과 단면이 다른 ‘T’자형이다. 두께는 우측이 좌측 것보다 약 2배 정도 넓다. 이 재사의 좌익사 서재에 설치된 ‘T’자형 설주는 풍소란대 역할을 겸한 것으로, 이런 유형은 대청의 일반형보다 다소 늦은 17∼18세기에 주로 나타나서 건물의 중건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 권인,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1231 ->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조선 태조 때 한성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교리 소야촌(所夜村)에 은둔하며 절의를 지켰다. 호를 송파(松坡)라 함은 고려의 수도인 송도(松都)를 잊지 못함을 뜻하는 것이다. 마을 이름인 소야(所夜)를 송파라 함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안동권씨 송파재사(安東權氏 松坡齋舍), A Bird Of Paradise,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elegant0302/2185
  • (참고) 안동권씨(安東權氏) 뿌리를 찾아서, kwon,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kwon3348/222623810581 -> 안동권씨는 시조 이후 10세(世)를 전후하여 15파로 갈라지는데, 그중에서 추밀원부사공파, 복야공파, 그리고 인가파와 좌윤공파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다. / 복야공파는 복야공 권수홍(權守洪)의 후손들이다. 그의 증손 권한공(權漢功)이 고려 충숙왕 때 시중(侍中, 지금의 총리)을 지냈고, 그의 아들 권중화(權仲和)는 조선 태종 때 영의정에 올랐다. 우찬성(右贊成)을 지낸 권벌, 공조판서 권응수(權應銖) 등도 손꼽히는 인물이다.
  • (참고) 문(門), 호(戶), 영쌍창(欞雙窓), 한옥을 생각하다,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kjn3814/222162200891 -> 영쌍창은 김일진 교수가 제안한 용어이며, 조선 전기와 중기에는 일반적인 형식이었으나 1700년대 이후 사라졌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