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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옹 송갑조 신도비 및 후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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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ndsey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3년 6월 20일 (화) 09:48 판 (St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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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옹송갑조신도비 및 후기비
대표명칭 수옹송갑조신도비 및 후기비
한자 睡翁宋甲祚神道碑 및 後記碑
주소 대전광역시 동구
지정번호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지정일 2021년 7월 19일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2기
웹사이트 수옹송갑조신도비 및 후기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신도비

수옹 송갑조 신도비는 송갑조의 평생 사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세운 비석이다. 송갑조의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원유(元裕), 호는 수옹(睡翁)이다. 송시열의 아버지로 영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도비는 17세기에 세워졌으며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두전**은 김수항의 글씨이다. 네모난 화강석을 다듬어 만든 받침돌을 놓고 비석을 세웠는데, 받침돌의 오른쪽 윗부분에 돌을 자르기 위해 쐐기를 박았던 흔적으로 보이는 구멍이 일렬로 남아 있다. 비석의 윗부분에는 네모난 판석 위에 간략화된 기와집 형태의 가첨석***을 올렸다. 이처럼 이중으로 된 가첨석과 조각을 하지 않고 화강석을 다듬은 비석 받침돌 등은 같은 시대인 조선 중기의 다른 신도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사례이다.


  • 추증(追贈): 공로가 있는 관료가 죽은 뒤에 그의 품계를 높여주는 것
  • 두전(頭篆): 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에 돌려 가며 쓴 전자(篆字)
  • 가첨석(加檐石): 비석 위에 덮어 얹은 지붕 모양의 돌

후기비

수옹 송갑조 후기비는 영조 2년(1726)에 송갑조가 경헌(景獻)으로 사시*를 받은 사실과 영의정으로 추증**된 내용을 기록하기 위해 18세기에 추가로 세운 비석이다. 오석(烏石)으로 된 비석 앞면의 큰 글자들의 일부가 떨어져서 지은이와 옮겨 쓴 이를 알기 어렵다. 그런데 이의현의 문집인 『도곡집(陶谷集)』의 기록을 보면 지은이는 이의현임을 알 수 있다. 이의현은 송시열의 문인이었던 제월당 송규렴의 아들인 송상기에 의해 당대의 명문장가로 천거된 인물이다.

후기비는 비석 받침돌 위에 비석을 놓고 기왓골이 선명하게 새겨진 우진각*** 형태의 가첨석****을 올렸다. 가첨석과 비대에 민속적인 문양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점과 신도비 후기를 비로 세운 사례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독특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다.


  • 사시(賜諡): 임금이 죽은 대신이나 장수에게 시호를 내려주던 일
  • 추증(追贈): 공로가 있는 관료가 죽은 뒤에 그의 품계를 높여주는 것
  • 우진각: 네 개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으로 지은 집
  • 가첨석(加檐石): 비석 위에 덮어 얹은 지붕 모양의 돌

영문

Stele and Commemorative Monument of Song Gap-jo

Stele of Song Gap-jo

This stele (sindobi) records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Song Gap-jo (1574-1628; pen name: Suyong),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nd the father of the renowned civil official and scholar Song Si-yeol (1607-1689).

Song Gap-jo was born in Songchon Village, Hoedeok (present-day Daejeon), which was a clan village of the Eunjin Song clan to which he belonged. Song passed both the classics and literary licentiate examinations in 1617. However, he chose not to pursue a career as a government official and instead devoted himself to teaching students in his hometown. He received an honorary government post in 1623. The following year, he escorted King Injo (r. 1623-1649) to refuge in Gongju during a revolt against the royal court. During the Manchu invasion of 1627, he also escorted Crown Prince Sohyeon (1625-1645) to refuge in Jeonju. In 1726, he was posthumously promoted to the office of chief state councilor.

The stele's inscription was composed by Song Si-yeol and calligraphed by the scholar Song Jun-gil (1606-1672), who was a fellow member of the Eunjin Song clan. The name of the stele was calligraphed by the civil official Kim Su-hang (1629-1689). The stele consists of a rectangular pedestal, a body stone, a rectangular capstone base, and a roof-shaped capstone. On the top right of the pedestal, there is a row of holes which are traces of where wedges were inserted to cut the stone. It is rare for a stele of the Joseon period to feature a capstone base and to have a pedestal that has been left undecorated.


  • 고향 언급하는데 고향이 어딘지에 대한 내용이 없어서 문장 추가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Epilogue Monument of Song Gap-jo

This epiloque monument (hugibi) was erected in the 18th century to record the facts of the civil official Song Gap-jo's (1574-1628) receipt of a posthumous name and promotion to the office of chief state councilor by King Yeongjo (r. 1724-1776)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in 1726. Song Gap-jo was the father of the renowned civil official and scholar Song Si-yeol (1607-1689).

The monument's inscription was composed and calligraphed by the esteemed writer Yi Ui-hyeon (1669-1745), who was recommended by Song Sang-gi (1657-1723), the son of one of Song Si-yeol's disciples, Song Gyu-ryeom (1630-1709). The monument consists of a pedestal, a body stone, and a capstone. The capstone is shaped like a hip roof, with vividly carved tiles. The variety of designs, including folk motifs, carved on the pedestal and capstone, together with the fact that there are few examples of so-called "epilogue monuments," make this a uniquely valuable cultural heritage.


  • 비문에 대한 내용은 너무 필요없이 길어서 줄렸습니다. 송강기, 송규렴 이름도 생락하는 것이 더 갈끔할 것 같습니다.
  • 해설문 혹시나 따로 읽을까봐 송시열관 송갑조의 관계를 여기서도 기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맨 마지막에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순서를 조정했습니다.
  • 연도가 있어서 정확히 어떤 임금이었는지 알 수 있어서 그렇게 썼습니다.

영문 해설 내용

신도비

조선시대의 문신 송갑조(1574-1628)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이다.

송갑조는 저명한 문신이자 학자인 송시열(1607-1689)의 아버지이다. 1617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1623년 관직을 받은 후 이듬해 반란이 일어났을 때 공주로 가는 왕을 호종하였고, 1627년 청나라가 침입했을 때 피난하는 세자를 호종하기도 하였다. 1726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도비는 네모난 받침돌, 몸돌, 이중의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다. 받침돌 오른쪽 윗부분에는 돌을 자르기 위해 쐐기를 박았던 흔적으로 보이는 구멍들이 일렬로 남겨져 있다. 몸돌 위에는 네모난 판석을 얹고 지붕돌을 얹었는데, 이처럼 지붕돌을 이중으로 만드는 것과 받침돌을 조각없이 다듬는 것은 조선시대 신도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사례이다.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고, 친척인 학자 송준길(1606~1672)이 글씨를 썼다. 비석 윗부분에 쓰인 비의 이름은 문신 김수항(1629-1689)이 썼다.

후기비

조선시대의 문신 송갑조(1574-1628)가 1726년 임금으로부터 시호를 받고 영의정으로 추증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18세기에 세워졌다.

비석은 받침돌,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돌은 기와골이 선명하게 새겨진 우진각지붕 형태이다. 받침돌과 지붕돌에 민속적인 문양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점과 신도비 후기를 비로 세운 사례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독특한 가치를 가지는 문화유산이다.

비문은 문신 이의현(1669-1745)이 지었다. 비석 앞면의 일부가 떨어져 지은이를 알기 어려웠으나, 이의현의 문집에 남은 기록을 통해 이의현이 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의현은 송시열의 제자 송규렴(1630-1709)의 아들인 송상기(1657-1723)에 의해 당대의 명문장가로 천거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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