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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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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양사
송양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송양사
한자 松陽祠
주소 전북 고창군 해리면 송산리 산 26, 32-1
지정번호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3호
지정일 2000년 6월 23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일제강점기
수량/면적 일원(7,223㎡)
웹사이트 송양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송양사'는 창녕 성씨들의 위패를 안치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우*이다. 1930년에 세웠고 1946년에 다시 지었다. 고려 시대 문신인 성사달과 성부, 조선 시대의 성여원, 성무조, 성경수 등의 위패*를 안치하고 있다. 누각인 풍욕루와 강당인 경현당, 학문을 연구하던 명성재, 관리사와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경현당 기둥 앞의 철제 난간 한 가운데에 성리학의 교리가 함축된 태극무늬가 있다. 일제가 태극무늬 철제 난간을 떼어 가려고 하였으나 이곳 선비들이 강하게 가로막자 포기하였다.

성여원은 문효공 성사달의 7대손으로, 연산군 당시 당쟁이 격화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창군 대산면 회룡리로 내려왔다. 그의 넷째 아들 성진철의 후손이 이사 오면서 송양사가 있는 솔뫼를 ‘청산리’라 하였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 당시 마을 사람들이 솔뫼로 안전하게 피신을 하게 되자 ‘송산’으로 개칭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 사우: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나 영정을 모셔 두고 제향을 행하는 장소
  • 위패: 죽은 사람의 이름과 죽은 날짜를 적은 나무패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송양사는 창녕 성씨 출신 인물들의 위패를 안치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1930년에 세운 사당이다.

이곳에는 현재 고려 시대 문신인 성사달과 성부, 조선 시대 문신 성여원, 성무조, 성경수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경내에는 사당인 송양사 외에도 출입구 역할을 하는 2층 누각 풍욕루와 강당 역할을 하는 경현당과 학문을 연구하던 명성재, 관리사와 창고 등이 있다.

경현당에는 태극무늬로 장식한 철제 난간이 둘러져 있는데, 일제가 이 난간을 떼어 가려고 하였으나 지역 선비들이 강하게 가로막자 포기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참고 자료

  • 南道 정자기행(279)-바람으로 목욕하는 곳 고창 풍욕루(風浴樓), 한국 매일, 2012.12.14. http://hankukmail.com/newshome/detail.php?number=18424&thread=21r03r06r01 -> 인물 5인 정보 (성사달(?-1380)은 1362년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왕을 호위하였으며 김용의 난을 평정하여 1등공신이 되었고, 1364년에는 여진의 침입을 막아 대제학에 올랐다. / 성부는 고려 후기 문신이자 정몽주의 문인으로 두문동(杜門洞) 72인 중 한 사람이다. / 성여원(1576-)은 조선 인조 때 의사(義士)로, 1624년 반란이 일어나 왕이 공주로 피난하자 다른 이들과 함께 여러 고을에 격문을 띄워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모으기도 하였다. / 성무조(1778-)와 성경수(1875-1922)는 조선 후기 및 개항기에 효자로 이름난 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