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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도성리 삼효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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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효행으로 정려가 내려진 성주 도성리에 살았던 밀양박씨 세 효자(박안련, 박시구, 박광인)기려 조선 고종 3년(1866)에 건립한 효자 정려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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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성주 도성리에 살았던 밀양 박씨 세 효자 박안련(朴安連), 박시구(朴蓍龜), 박광인(朴光仁)의 효행을 기려 조선 고종 3년(1866)에 세운 효자 정려각이다. 정려(旌閭)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을 표창하던 일로, 비석이나 나무판에 정려를 받은 인물의 이름 등을 적고,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이를 보호하기 위한 작은 건물을 세웠다. 문을 세우면 정려문이라 하고, 건물을 세우면 정려각이라 한다. 
  
정려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비석이나 나무판에 정려된 인물의 이름 등을 간략히 적었다. 그리고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이를 보호하기 위한 작은 건물을 세웠다. 문을 세우면 정려문이라 하고, 건물을 세우면 정려각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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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효자의 효행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박안련은 아버지의 병에 사람 고기가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몰래 드렸다고 하며, 엄동설한에 잉어를 먹고 싶어 하나 구할 수 없어 한탄하자 살아 있는 잉어가 마당에 나타나 드릴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후손 박시구는 어머니가 위중할 때 어머니의 변을 먹어 보고 건강 상태를 확인하며 간호하였고,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손가락을 돌로 쳐서 피를 내어 드시게 하자 회복했다고 전한다. 박시구의 아들인 박광인도 어머니의 병환이 심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리니 좋아졌고,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하늘에 도움을 청하니 꿩이 스스로 날아들어 잡아 드리는 등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삼효각에 정려된 세 효자의 효행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니, 박안련(1566~1619)은 아버지의 병에‘인육(人肉)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몰래 드렸다고 하며, 엄동설한에 잉어를 먹고 싶어 함에 구할 수 없음을 한탄하자 살아 있는 잉어가 마당에 나타나 봉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후손 박시구(1764~1793) 역시 어머니가 위중할 때 어머니의 변을 먹어보고 건강상태를 확인하며 간호하였고,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손가락을 돌로 쳐서 피를 내어 드시게 하여 회복했다고 전한다. 박시구의 아들인 박광인(1783~1835)도 어머니의 병환이 심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려 차도가 있었고,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함에 하늘에 도움을 청하니 꿩이 스스로 날아들어 잡아 봉양하는 등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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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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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려각은 성주에 살았던 밀양 박씨 집안의 박안련(1566-1619), 박시구(1764-1793), 박광인(1783-1835)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66년에 세워졌다. 1911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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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려각은 성주에 살았던 밀양박씨 집안의 박안련(1566-1619), 박시구(1764-?), 박광인(1795-1835)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66년에 세워졌다. 원래 다른 곳에 있었는데, 1911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박안련은 병에 걸린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몰래 베어 아버지가 드시도록 했다고 한다. 또 아버지가 잉어를 먹고 싶어 했지만 추운 겨울이라 구할 수 없어 한탄하자 마당에 살아있는 잉어가 나타나 그것을 잡아 봉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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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안련은 아버지의 병에 사람 고기가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몰래 드렸다고 한다. 또, 아버지가 잉어를 먹고 싶어 하시는데, 엄동설한이라 구할 수 없어 한탄하자 살아 있는 잉어가 마당에 나타났다고 한다.  
 
 
박시구는 어머니의 변을 맛보아 건강을 확인하며 간호하였으며, 어머니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돌로 쳐 낸 피를 어머니 입 안에 피를 흘려 넣어 살려냈다고 한다.
 
  
박광인은 어머니의 병이 심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어머니 입 안에 피를 흘려 넣어 회복을 도왔고,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하늘에 기도하니 꿩이 스스로 날아들어 그것을 잡아 봉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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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안련의 후손 박시구는 어머니가 위중할 때 어머니의 변을 먹어 보고 건강 상태를 확인하며 간호하였다. 어머니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자신의 손가락을 돌로 쳐 낸 피를 어머니 입 안에 흘려 넣어 어머니를 살려냈다고 한다.
  
*정려각 안에는 오른쪽부터 박광인, 박시구, 박안련의 정려 현판이 각각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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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구의 아들인 박광인도 어머니의 병환이 심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어머니 입 안에 피를 흘려 넣어 회복을 도왔다. 어머니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하늘에 기도하니 꿩이 스스로 집에 날아들었다고 한다.
*검색되는 자료가 거의 없어 지자체 제공 문안 위주로 정리함.
 
  
 
=='''참고자료'''==
 
=='''참고자료'''==

2021년 12월 4일 (토) 05:03 판


성주 도성리 삼효각
성주 도성리 삼효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성주 도성리 삼효각
한자 星州 道成里 三孝閣 "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도성리 1113-2"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24호
지정일 2014년 10월 30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생활유적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棟⁄18.7㎡
웹사이트 성주 도성리 삼효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 건물은 성주 도성리에 살았던 밀양 박씨 세 효자 박안련(朴安連), 박시구(朴蓍龜), 박광인(朴光仁)의 효행을 기려 조선 고종 3년(1866)에 세운 효자 정려각이다. 정려(旌閭)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을 표창하던 일로, 비석이나 나무판에 정려를 받은 인물의 이름 등을 적고,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이를 보호하기 위한 작은 건물을 세웠다. 문을 세우면 정려문이라 하고, 건물을 세우면 정려각이라 한다.

세 효자의 효행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박안련은 아버지의 병에 사람 고기가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몰래 드렸다고 하며, 엄동설한에 잉어를 먹고 싶어 하나 구할 수 없어 한탄하자 살아 있는 잉어가 마당에 나타나 드릴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후손 박시구는 어머니가 위중할 때 어머니의 변을 먹어 보고 건강 상태를 확인하며 간호하였고,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손가락을 돌로 쳐서 피를 내어 드시게 하자 회복했다고 전한다. 박시구의 아들인 박광인도 어머니의 병환이 심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리니 좋아졌고,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하늘에 도움을 청하니 꿩이 스스로 날아들어 잡아 드리는 등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정려각은 성주에 살았던 밀양박씨 집안의 박안련(1566-1619), 박시구(1764-?), 박광인(1795-1835)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66년에 세워졌다. 원래 다른 곳에 있었는데, 1911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박안련은 아버지의 병에 사람 고기가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몰래 드렸다고 한다. 또, 아버지가 잉어를 먹고 싶어 하시는데, 엄동설한이라 구할 수 없어 한탄하자 살아 있는 잉어가 마당에 나타났다고 한다.

박안련의 후손 박시구는 어머니가 위중할 때 어머니의 변을 먹어 보고 건강 상태를 확인하며 간호하였다. 어머니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자신의 손가락을 돌로 쳐 낸 피를 어머니 입 안에 흘려 넣어 어머니를 살려냈다고 한다.

박시구의 아들인 박광인도 어머니의 병환이 심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어머니 입 안에 피를 흘려 넣어 회복을 도왔다. 어머니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하늘에 기도하니 꿩이 스스로 집에 날아들었다고 한다.

참고자료

  • 성주 도성리 삼효각,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성주_도성리_삼효각 -> 삼효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건물 내부는 3칸통으로 개방된 공간으로 꾸며져 있고, 바닥은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되어 있다. 내부 좌측면의 대들보에는‘삼효각 상량문(三孝閣 上樑文)’우측면 대들보에는‘삼세 정각 이건기(三世 旌閣 移建記)’가 걸려 있고 후면 우협칸 벽상에‘효자증 동몽교관응천박공휘광인지려(孝子贈童蒙敎官凝川朴公諱光仁之閭)’, 어칸에‘효자증동몽교관응천박공휘시구지려(孝子贈童蒙敎官凝川朴公諱蓍龜之閭)’, 좌협칸에‘효자증사헌부감찰응천박공휘안연지려(孝子贈司憲府監察凝川朴公諱安連之閭)’정려가 각기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