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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진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인 비로자나불을 나타낸 것이다. 고려 혜공왕 2년(766)에 법승(法勝)과 법연(法緣) 두 승려가 석남암사(石南巖寺, 또는 석남암수) 관음암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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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지리산 중턱 석남암사의 옛터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석남리에 거주하던 한 형제가 1947년 경 대좌와 광배를 제외한 불상만 반출해 자택에서 보관하였고, 1959년 내원사(지금의 덕산사)가 재건될 때 사찰에 양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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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으로, 편년자료가 부족한 고대 조각사 연구에 절대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지권인이란 곧게 편 왼손 집게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손모양을 말한다. 이러한 손모양은 비로자나불을 나타내는 특징이며, 이는 부처의 세계가 중생의 세계를 진리의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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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는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크게 솟아있고, 목에는 번뇌, 업, 고통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이마와 눈썹 사이에 구슬 모양으로 새겨진 부분은 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빛나는 털을 나타낸 것이며, 부처의 자비가 온 세계에 비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양쪽 어깨를 덮는 법의(法衣)는 어깨와 소매의 옷주름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가 일부 남아있다. 일부 훼손된 부분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비례가 적절하고 조각 수준이 높아 조형적으로 우수하다.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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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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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정밀실측조사보고서, 산청군청,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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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정밀실측조사보고서』, 산청군청,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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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승격 및 「고려 십육나한도(제7 가리가존자)」등 6건 보물 지정, 문화재청 보도자료, 2016.01.07. http://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newsItemId=155699617&sectionId=b_sec_1&pageIndex=1&strWhere=&strValue=&mn=NS_01_02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로 승격,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160107083500005  →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766년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권인(智拳印·가슴 앞에 세운 왼손 검지의 첫 마디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손 모양) 비로자나불상이다. 한동안 학계에서는 지권인을 취하고 있는 비로자나불 형식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를 9세기 중엽으로 보았지만, 이 불상의 발견으로 8세기 중엽에 이미 전해졌음을 알 수 있게 됐다. 이는 신라가 당나라와의 활발한 교류 속에서 불교의 새로운 변화와 흐름을 신속하게 반영했음을 보여준다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로 승격,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160107083500005  →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766년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권인(智拳印·가슴 앞에 세운 왼손 검지의 첫 마디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손 모양) 비로자나불상이다. 한동안 학계에서는 지권인을 취하고 있는 비로자나불 형식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를 9세기 중엽으로 보았지만, 이 불상의 발견으로 8세기 중엽에 이미 전해졌음을 알 수 있게 됐다. 이는 신라가 당나라와의 활발한 교류 속에서 불교의 새로운 변화와 흐름을 신속하게 반영했음을 보여준다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1113802330100 → 이 비로자나불상은 불상의 중대석에서 발견된 납석사리호의 명문을 통해 766년(혜공왕 2)에 법승(法勝)과 법연(法緣) 두 승려가 받들어 돌아가신 두온애랑(豆溫哀郞)의 원을 위해 석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무구정광대다라니와 함께 석남암수 관음암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을 가진 중요한 불상이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 最古의 紀年銘의 智拳印 비로자나불상으로서 중요하며, 편년자료가 부족한 고대조각사 연구에도 절대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더불어 지권인을 한 如來形의 비로자나불 형식이 766년에 정립되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불교 사상과 새로운 불교사의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서 주목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불상은 동아시아를 통틀어 명문이 밝혀진 최초의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으로서 도상적․양식적으로 불교미술사 연구에 매우 귀중하고 획기적인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이 불상을 통해 8세기 중엽경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불상에도 납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우리나라 불상 복장의 시원적 형태를 엿볼수 있다.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1113802330100 → 이 비로자나불상은 불상의 중대석에서 발견된 납석사리호의 명문을 통해 766년(혜공왕 2)에 법승(法勝)과 법연(法緣) 두 승려가 받들어 돌아가신 두온애랑(豆溫哀郞)의 원을 위해 석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무구정광대다라니와 함께 석남암수 관음암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을 가진 중요한 불상이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 最古의 紀年銘의 智拳印 비로자나불상으로서 중요하며, 편년자료가 부족한 고대조각사 연구에도 절대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더불어 지권인을 한 如來形의 비로자나불 형식이 766년에 정립되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불교 사상과 새로운 불교사의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서 주목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불상은 동아시아를 통틀어 명문이 밝혀진 최초의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으로서 도상적․양식적으로 불교미술사 연구에 매우 귀중하고 획기적인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이 불상을 통해 8세기 중엽경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불상에도 납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우리나라 불상 복장의 시원적 형태를 엿볼수 있다.

2021년 5월 26일 (수) 01:21 판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Stone Seated Vairocana Buddha from Seongnamamsa Temple Site, Sancheong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영문명칭 Stone Seated Vairocana Buddha from Seongnamamsa Temple Site, Sancheong
한자 山淸 石南巖寺址 石造毘盧遮那佛坐像
주소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하내원로 256, 덕산사 (대포리)
지정번호 국보 제233-1호
지정일 2016년 1월 7일
분류 유물/불교조각/석조/불상
소유자 덕산사
관리자 덕산사
시대 통일신라
수량/면적 1구
웹사이트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불상의 높이는 102cm,어께너비 52.5cm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이다.

화강암의 불상은 곧게 편 왼손 집게 손가락을 오른손 안에 넣는 지권인(智拳印)의 비로자나불이다. 당당하고 세련된 모습이지만 마멸이 심해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원래 석남암사터에 있었던 것을 현재의 내원사(內院寺)로 옮겨 놓았다. 육계(肉啓)가 높고 나발(螺髮)도 크지만 둥근 편이다. 단아한 눈, 단정한 코, 작고 예쁜 입, 볼록한 뺨의 양감이 돋보인다. 상체는 넓은 편이나 낮아서 대좌(臺座) 위에 앉아야 안정되게 보이도록 되어있다.

얇은 법의(法衣)가 양어깨와 전신을 두르고 있어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난다. 촘촘한 옷 주름은 흐르는 듯 아름다워 8세기 신라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배 모양의 광배(光背)는 오른쪽 1/3가량이 파손되었다. 불상을 받치는 대좌는 연꽃봉우리의 상좌, 8각형의 중좌, 연꽃잎의 하좌로 구성되었다.

중좌 중앙의 구멍에 있었던 사리를 넣는 장치는 도난 되었다가 부산시립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사리단지의 표면에 15줄 136자의 글이 새겨 있어 불상조성에 대한 정확한 내용을 알려주고 있다. 이 글에 따르면 766년 [영태 2] 에 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석남암사에 봉안했다고 한다.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만든 시기가 확실한 드문 불상이다.

  • 내원사는 덕산사로 명칭 변경되었으며 (21.04) 육계(肉啓)의 한자는 육계(肉髻)임

수정 국문

초고

덕산사(德山寺) 비로전(毘盧殿)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진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인 비로자나불을 나타낸 것으로, 1966년 이 지역의 불교 유적을 조사하던 학술조사단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원래 지리산 중턱 석남암사지(石南巖寺址)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석남리에 거주하던 형제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7년 경 대좌와 광배를 제외한 불상만 반출해 자택에서 10여년 간 보관하다가, 1959년 내원사가 재건될 때 사찰에 양도되었다고 한다.

불상은 곧게 편 왼손 집게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의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는 비로자나불의 특징이다. 머리에는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크게 솟아있고, 목에는 번뇌, 업, 고통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이마와 눈썹 사이에 구슬 모양으로 새겨진 부분은 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빛나는 털을 나타낸 것이며, 부처의 자비가 온 세계에 비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양쪽 어깨를 덮는 법의(法衣)는 어깨와 소매의 옷주름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가 일부 남아있다. 불상은 단아한 이목구비와 당당한 모습이 돋보이지만, 오랜 시간 외부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풍화로 인한 마멸이 심해진 상태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연꽃 장식의 대좌(臺座) 중간층 중앙의 구멍에서 발견된 납석사리호(蠟石舍利壺, 국보 제233-2호)의 표면에 불상의 조성과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통일신라 때인 766년 법승(法勝)과 법연(法緣) 두 승려가 석남암사(石南巖寺, 또는 석남암수) 관음암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사리호는 현재 부산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불상은 동아시아를 통틀어 명문이 밝혀진 최초의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으로, 편년자료가 부족한 고대조각사 연구에도 절대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 이 불상을 통해 8세기 중엽경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불상에도 납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우리나라 불상 복장의 시원적 형태를 엿볼수 있다.
  •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존재가 처음 학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신라오악학술조사단(新羅五岳學術調査團)은 지리산지구의 불교유적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 조사에서 산청군 삼장면에 내원사라는 사찰이 있고, 그 계곡에는 신라시대의 불교 문화재들이 산재한다는 것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당시 내원사는 6.25 사변 중에 완전히 소실되었고 삼층석탑 1기와 석등하대석 등 몇 점의 석물만이 남아 있었는데 마당에 방치되어 있던 석불이 조사단 일행의 관심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 당시 내원사 주지스님의 도움으로 석불을 산중에서 반출한 당사자를 찾을 수 있었고, 당사자를 통해 석불이 내원사에 안치된 전반적인 경위가 밝혀지게 되었다. 반출 당사자는 산청군 삼장면 석남리에 거주하던 이〇〇형제로 6.25 사변이 나기 전인 1947년경에 이 석불을 보선암지라고 불리는 산중에서 반출하였다고 한다. 당시 좌대와 광배는 기존터에서 반출되지 않고 석불만 반출되었으며, 이〇〇형제는 반출한 석불을 약 10여년 동안 자택에 봉안하였다가 1959년경 내원사에 양도하였다고 한다.
  •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불상과 사리호가 각각 다른 경로로 반출되고 대좌와 광배만이 도괴되어진 상태로 기존 유지에 남아 있었다. 현재는 경남(慶南) 산청군(山淸郡) 내원사(內院寺)에 불상과 대좌, 광배가 결합된 형태로 안치되어 있으며 근래에 새로 건립된 비로전 전각 내에 모셔져 있다. 중대석 안에 납입되어 있던 납석사리호는 현재 부산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차 수정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진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인 비로자나불을 나타낸 것이다. 고려 혜공왕 2년(766)에 법승(法勝)과 법연(法緣) 두 승려가 석남암사(石南巖寺, 또는 석남암수) 관음암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하였다.

원래 지리산 중턱 석남암사의 옛터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석남리에 거주하던 한 형제가 1947년 경 대좌와 광배를 제외한 불상만 반출해 자택에서 보관하였고, 1959년 내원사(지금의 덕산사)가 재건될 때 사찰에 양도하였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으로, 편년자료가 부족한 고대 조각사 연구에 절대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지권인이란 곧게 편 왼손 집게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손모양을 말한다. 이러한 손모양은 비로자나불을 나타내는 특징이며, 이는 부처의 세계가 중생의 세계를 진리의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머리에는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크게 솟아있고, 목에는 번뇌, 업, 고통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이마와 눈썹 사이에 구슬 모양으로 새겨진 부분은 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빛나는 털을 나타낸 것이며, 부처의 자비가 온 세계에 비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양쪽 어깨를 덮는 법의(法衣)는 어깨와 소매의 옷주름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가 일부 남아있다. 일부 훼손된 부분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비례가 적절하고 조각 수준이 높아 조형적으로 우수하다.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

  •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정밀실측조사보고서』, 산청군청, 2017.
  •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승격 및 「고려 십육나한도(제7 가리가존자)」등 6건 보물 지정, 문화재청 보도자료, 2016.01.07. http://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newsItemId=155699617&sectionId=b_sec_1&pageIndex=1&strWhere=&strValue=&mn=NS_01_02
  •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로 승격,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160107083500005 →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766년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권인(智拳印·가슴 앞에 세운 왼손 검지의 첫 마디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손 모양) 비로자나불상이다. 한동안 학계에서는 지권인을 취하고 있는 비로자나불 형식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를 9세기 중엽으로 보았지만, 이 불상의 발견으로 8세기 중엽에 이미 전해졌음을 알 수 있게 됐다. 이는 신라가 당나라와의 활발한 교류 속에서 불교의 새로운 변화와 흐름을 신속하게 반영했음을 보여준다
  •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1113802330100 → 이 비로자나불상은 불상의 중대석에서 발견된 납석사리호의 명문을 통해 766년(혜공왕 2)에 법승(法勝)과 법연(法緣) 두 승려가 받들어 돌아가신 두온애랑(豆溫哀郞)의 원을 위해 석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무구정광대다라니와 함께 석남암수 관음암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을 가진 중요한 불상이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 最古의 紀年銘의 智拳印 비로자나불상으로서 중요하며, 편년자료가 부족한 고대조각사 연구에도 절대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더불어 지권인을 한 如來形의 비로자나불 형식이 766년에 정립되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불교 사상과 새로운 불교사의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서 주목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불상은 동아시아를 통틀어 명문이 밝혀진 최초의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으로서 도상적․양식적으로 불교미술사 연구에 매우 귀중하고 획기적인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이 불상을 통해 8세기 중엽경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불상에도 납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우리나라 불상 복장의 시원적 형태를 엿볼수 있다.
  • <참고>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납석사리호,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1112102330000 → 경상남도 지리산 암벽 아래에 있는 암자터에서 불상이 없는 대좌의 가운데 받침돌 안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때의 거무스름한 곱돌(납석)로 만들어진 항아리로 총 높이 14.5㎝, 병 높이 12㎝, 아가리 지름 9㎝, 밑 지름 8㎝이다. 몸통에 비해 도톰한 턱이 주둥이에 둘러져 있고, 밑 부분은 평편하고 넓어 안정감을 준다. 항아리의 아가리 아랫부분과 몸체의 중간, 그리고 조금 아래쪽에 각각 2줄의 가로선을 새겼다. 뚜껑 윗부분에도 2줄로 원을 그리고 안쪽 가운데에는 연꽃을 새겼다. 이 항아리 표면에는 15행으로 돌아가며 비로자나불의 조성 기록과 함께 영태 2년<신라 혜공왕 2년(766)>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어, 신라 비로자나불 좌상의 제작 연대를 8세기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새겨진 글자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불규칙하게 나열되어 있어 판독이 애매한 곳도 있으나, 죽은자의 혼령을 위로하고 중생을 구제하길 바라는 글로 되어 있다. 전체적인 제작 기법이나 뚜껑 처리 방식, 글자의 새김 등 미술사적 측면과 비로자나불의 제작연대, 석불의 법사리 봉안과 조성 등 불교사적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가 된다.
  • 천년고찰 산청 내원사 본래 명칭 ‘덕산사’ 되찾았다, 경남일보, 2021.4.4. 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2120 → 덕산사의 안내문에 따르면 신라 태종 무열왕 4년(657)년에 원효대사가 처음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동방의 대보살로 불렸던 무염국사(801~888)가 상주하며 수많은 수행자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오래된 사찰들이 그러하듯 천여년이 지난 광해군 1년(1609)에 원인모를 화재로 절터만 남기고 전소됐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959년 원경스님이 절을 다시 세우고 내원사로 이름을 바꿨다고 전해진다. 그동안 문헌 상 기록 외에 기존의 내원사가 덕산사의 자리에 세워진 것을 실증하는 자료를 발견하지 못해 내원사는 본명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0월 대웅전의 위치고증을 위한 시굴조사에서 덕산사의 사찰명이 새겨진 기와가 발굴돼 비로소 내원사가 덕산사의 사지(寺址)에 지어진 것을 확인했다. 산청군과 내원사는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명칭 되찾기를 진행했으며, 지난 3월 중순 대한불교 조계종은 내원사의 사찰명을 덕산사로 변경하는 것을 승인했다. 이후 군은 3월 26일자로 전통사찰 변경등록을 완료했다.
  • 국보 제 233-1호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제113호 내원사 3층석탑, 누리고 가야, 네이버 블로그, 2019.8.25. https://blog.naver.com/richpulse/221627606749 →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