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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유학자 손응룡(1741~1822)의 묘제(墓祭)*를 모시기 위해 증손자 건(鍵)이 1863년 묘소 아래에 지은 재숙소(齋宿所)가 화재로 소실되자 손자 기형(基亨)이 1906년 별장을 겸해 새로 지었다. 조선 말기에서 근대 초기에 이르는 격동기에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밀양 향반(鄕班)들의 재실 건축 경향과 특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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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당시 당호는 모선재(慕先齋), 구호당(龜湖堂)이었으나 중창하면서 칠산정이라고 고쳐 불렀다. 칠산은 손응룡의 호 칠산옹(七山翁)에서 따왔다. 그가 후진을 양성하고 빈곤한 가정에 도움을 줬다는 행적은 모선정기(慕先亭記), 칠산정 12경(七山亭 12景) 등의 현판에 기록되어 있다. 가운데 마루는 모임 장소로, 좌우 온돌방은 제관들의 거처로 사용됐다. 칠산정 서편에 들어선 청송루(廳松樓)는 온돌방과 누마루를 겸비한 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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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규모와 배치가 모선정기 내용과 상당 부분 부합해 창건 당시 모습에 준해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적인 경사를 살려 건물 끝에 누마루를 조성하는 기법은 이 시기 밀양 지방 누정(樓亭)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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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제: 무덤 앞에서 지내는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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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11일 (수) 08:54 판


밀양 칠산정
밀양 칠산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밀양 칠산정
한자 密陽 七山亭
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미3길 48-38
지정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78호
지정일 2009년 10월 22일
분류 유적건조물
수량/면적 4동
웹사이트 밀양 칠산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조선 후기 유학자 손응룡(1741~1822)의 묘제(墓祭)*를 모시기 위해 증손자 건(鍵)이 1863년 묘소 아래에 지은 재숙소(齋宿所)가 화재로 소실되자 손자 기형(基亨)이 1906년 별장을 겸해 새로 지었다. 조선 말기에서 근대 초기에 이르는 격동기에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밀양 향반(鄕班)들의 재실 건축 경향과 특징을 보여준다.

창건 당시 당호는 모선재(慕先齋), 구호당(龜湖堂)이었으나 중창하면서 칠산정이라고 고쳐 불렀다. 칠산은 손응룡의 호 칠산옹(七山翁)에서 따왔다. 그가 후진을 양성하고 빈곤한 가정에 도움을 줬다는 행적은 모선정기(慕先亭記), 칠산정 12경(七山亭 12景) 등의 현판에 기록되어 있다. 가운데 마루는 모임 장소로, 좌우 온돌방은 제관들의 거처로 사용됐다. 칠산정 서편에 들어선 청송루(廳松樓)는 온돌방과 누마루를 겸비한 누각이다.

건물 규모와 배치가 모선정기 내용과 상당 부분 부합해 창건 당시 모습에 준해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적인 경사를 살려 건물 끝에 누마루를 조성하는 기법은 이 시기 밀양 지방 누정(樓亭)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 묘제: 무덤 앞에서 지내는 제사.

영문

영문 해설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