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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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휴정
만휴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만휴정
한자 晩休亭
주소 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하리길 42 (묵계리)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3호
지정일 1986년 12월 11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만휴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건물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 조선 연산군(燕山君) 6년(1500)에 지은 정자이다. 김계행은 문신으로 청백리에 뽑혔다. 보백당은 안동 소산에서 태어나 성균관에 입학하여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교유하였다. 50세가 넘어 과거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홍문관(弘文館) 부제학 등의 관직을 역임하다가 연산군의 폭정을 만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이 정자를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여러 차례 수리를 통하여 다소 변형되었으나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이는 부분도 있다.

동남향으로 자리한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앞쪽은 3면이 개방된 누마루 형식으로 개방하여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누각 주위 3면에는 계자 난간을 설치하였다. 전면 쪽을 고스란히 개방하여 툇마루로 구성한 예는 흔하지 않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처마 앙곡과 안허리가 매우 날카로워 정자의 맛을 더욱 살리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 1500년(연산군 6)에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를 지은 목적은 말년에 독서와 사색 및 강학을 하기 위해서이다.

김계행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삼사의 요직을 두루 지내며 간쟁업무에 힘썼다. 연산군 대에 대사간에 있으면서 척신들의 비위를 논박하였으나, 시정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 벼슬을 버리고 안동 풍산에 은거하였다.

그는 청백리로 유명하였는데, 보백당이라는 호는 그가 일찍이 읊었던 시 구절 가운데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지만 보물로 여기는 것은 청렴과 결백이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는 글에서 따온 것이다. 1498년(연산군 4)에 안동에 내려와 지은 집의 이름도 그의 호를 따서 보백당이다.

현재의 건물은 여러 차례 수리를 통하여 다소 변형되었으나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이는 부분도 있다. 정자 아래 바위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란 큰 글씨를 새겨 놓았다.

1차 수정

만휴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 말년에 독서와 강학을 하기 위해 1500년에 지은 정자이다.

김계행은 1480년 50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특히 관리들의 감찰과 탄핵을 주로 하는 관서의 요직을 두루 지내면서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여 바로잡는 일에 힘썼다. 연산군 대에 왕의 외척들의 잘못을 왕에게 지적하였으나, 고쳐질 가망이 없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 풍산에 은거하였다.

그는 청백리로 유명하였는데, 보백당(寶白堂)이라는 호는 그가 일찍이 읊었던 시 구절 가운데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지만 보물로 여기는 것은 청렴과 결백이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는 글에서 따온 것이다. 1498년에 안동에 내려와 지은 집의 이름도 그의 호를 따서 보백당이라 하였다.

보백당 바로 옆에 지은 정자인 만휴정의 이름은 ‘말년에 쉬는 정자’라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정자 아래 바위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란 큰 글씨를 새겨 놓았는데, ‘보백당이 말년에 쉬는 정자와 산수의 경치’라는 의미이다.

참고자료

  • 황만기, 「만휴정과 영남 선비들의 교류」, 『국학연구』 33, 한국국학진흥원, 2017.
  • 정시열, 「寶白堂 金係行의 인물됨과 처신에 대한 一考 - ‘淸白’의 실천과 후대 遺文을 통한 탐색」, 『국학연구』 33, 한국국학진흥원, 2017.

→ 위의 자료를 통해 김계행의 청렴한 삶과 그의 자호에 관한 일, 그리고 만휴정에서의 강학과 교류 문인들에 대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