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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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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1866년(고종 3)에 일어난 병인양요(丙寅洋擾)에서 프랑스군을, 1871년(고종 8)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미군을 물리친 정부가 외국과의 화친을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4월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중의 하나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게 되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洋夷侵犯 不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이 전면에 큰 글씨로 "만년에 걸친 자손들에게 경계하노니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라는 내용이 좌측에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높이 220cm, 폭 49cm, 두께 16cm이다. 노량 선착장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무관심 속에 묻혀 있었는데, 설천중학교 입구로 옮겨 세웠다가 1998년 8월 5일 옛 자리인 현 위치에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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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는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이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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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에 처음 척화비를 세웠던 곳은 노량 선착장 입구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무관심 속에 묻혀 있던 것을 해방 후 마을 사람들이 설천중학교 입구로 옮겨 보전하였다. 그 뒤 1998년 8월 남해군과 남해문화원에서 원래 자리와 가까운 마을 안으로 옮겼다가, 남해 충렬사 성역화 사업이 끝나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초고====
 
척화비는 1866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한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이 조선을 침략한 신미양요가 연달아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앞서 프랑스의 침공을 격퇴한 흥선대원군[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며, 그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내용의 글을 반포, 쇄국 의지를 강하게 천명하였다. 이후 미군이 강화도에서 퇴각하자 흥선대원군은 서울 종로 네거리, 경기도 강화, 경상도 동래군·함양군·경주·부산진 등을 포함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
남해 척화비는 낮은 사각 받침돌 위에 몸돌이 있고 맨 위에 지붕돌이 올려져 있는 형태로, 다른 척화비와는 모습이 달라 지방 관청에서 대원군의 척화비를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비석에는 병인양요 이래의 구호인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의 12자가 큰 글자로,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가 작은 글자로 각각 새겨져 있다.
+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를 크게 새긴 다음 왼쪽에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戒我萬年子孫).’는 작은 글자를 덧붙였다.  
  
그 뒤 1882년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이 틈을 탄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었으나, 남해 척화비처럼 몇 기의 비들이 여전히 남아 그 속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
1882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뒤, 조선이 문호를 열게 되면서 척화비는 대부분 철거하였는데 지금까지 전국에 남아 있는 20여 기는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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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척화비는 서양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이들과 맞서 싸우자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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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appeasement Stele, Namhae'''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등을 치른 뒤,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자 전국에 척화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를 크게 새겼고, 그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戒我萬年子孫)’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이러한 척화비는 1882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조선이 문호를 열게 되면서 대부분 철거되었다.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20여 기의 척화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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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one of the many anti-appeasement steles set up across the country in 1871.
  
남해 척화비는 높이 220cm, 폭 49cm, 두께 16cm이다.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와는 크기와 규모가 달라 지방관청이 대원군의 척화비를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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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lowing devastating armed conflicts on Korean soil with France in 1866 and the United States in 1871, Heungseon Daewongun (1820-1898), the prince regent and de facto ruler during the early period of King Gojong’s reign (r. 1863-1907), ordered these steles be erected to warn people against opening Korea to Western powers. Each stele bears twelve Chinese characters, reading, “The Western barbarians have invaded. To not fight is to advocate peace. To advocate peace is to sell out the country.” Next to this admonition are small characters which read, “Let this be a warning to our offspring for the next ten-thousand years.” After King Gojong took control of state affairs, Korea opened itself to foreign exchange, and most such steles were taken down. Over 20 of them have survived to this day and were designated as cultural heritages.
  
====자문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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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nti-appeasement stele was originally erected at the entrance to Noryang Harbor, but in the second half of the 20th century, it was moved by the local people to the entrance of Seolcheon Middle School. In 1998, it was moved back to the area near its original site, and in '''0000''', it was moved once more to its current location. The stele consists of a rectangular pedestal, a body stone, and a roof-shaped capstone. It is presumed that this stele was erected by the local government office and was modeled on the steles erected by Heungseon Daewongun’s order.
# 분야별 자문위원 1
 
#*세울 것을 명하였다. → 세우게 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와는 크기와 규모가 달라” :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의 규모가 일정하였다면 그 규모도 기술해 주면 이해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척화비는 서양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이들과 맞서 싸우자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세운 것으로,''' 흥선대원군(1820~1898)'''이'''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이후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자 '''전국 각지에 세웠다.''' <br/> '''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했을 때'''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이 '''큰 글자로''' 새겨져 있고, 그 옆에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며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척화비는 1882년'''(고종 19)'''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 대부분 철거되었으'''며''',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20여 기'''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br/> 남해 척화비는 높이 220cm, 폭 49cm, 두께 16cm이다.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와는 크기와 규모가 달라 지방 관청이 대원군의 척화비를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복잡한 문장 정리, 불필요한 정보 삭제) ''척화비는 서양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이들과 맞서 싸우자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br/>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등을 치른 뒤,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자 전국에 척화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고,''' 그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戒我萬年子孫)’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1882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조선이 문호를 열게 되면서 척화비는 대부분 철거되었고 현재는 전국에 20여 기만 남아있다. '''<br/>남해 척화비는 높이 220cm, 폭 49cm, 두께 16cm이다.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와는 크기와 규모가 달라 지방관청이 대원군의 척화비를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
 
  
====2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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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척화비는 서양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이들과 맞서 싸우자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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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은 1871년 전국에 세워졌던 여러 척화비 중 하나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등을 치른 뒤,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자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게 하였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를 크게 새겼고, 그 옆에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戒我萬年子孫)’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1882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조선이 문호를 열게 되면서 척화비는 대부분 철거되었고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20여 기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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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친부이자 당시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1820-1898)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등을 치른 뒤,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자 전국에 척화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를 크게 새겼고, 그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이러한 척화비는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된 후, 조선이 문호를 열게 되면서 대부분 철거되었다.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20여 기의 척화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남해 척화비는 높이 220cm, 폭 49cm, 두께 16cm이다.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와는 크기와 규모가 달라 지방관청이 대원군의 척화비를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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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에 처음 척화비를 세웠던 곳은 노량 선착장 입구였으나 20세기 후반 마을 사람들이 설천중학교 입구로 옮겼다. 1998년 원래의 자리와 가까운 곳으로 또 옮겼다가, '''0000년'''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사각 받침돌,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방 관청에서 대원군의 척화비를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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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tomato">지금 위치로 옮긴 시기 확인 필요. 남해 충렬사 성역화 사업이 언제 끝났는지?</font>
  
 
=='''문맥요소'''==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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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_흥선대원군 || Actor || 조선_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 ||  
 
| 조선_흥선대원군 || Actor || 조선_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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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38-0266-0000 || Heritage || (경상남도_문화재자료_제266호)남_해_척화비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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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38-0266-0000 || Heritage || (경상남도_문화재자료_제266호)_남해_척화비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6호로 지정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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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참고자료'''==
 
* 척화비(斥和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5752  
 
* 척화비(斥和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5752  
* 남해척화비(南海斥和碑),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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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척화비(南海斥和碑),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802660000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802660000  
 
 
* 남해 척화비(南海斥和碑), 두산백과
 
* 남해 척화비(南海斥和碑), 두산백과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66558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66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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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국문집필]]
 
[[분류:2021 국문집필]]
 
[[분류:2021 국문초안지원사업]]
 
[[분류:2021 국문초안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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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영문집필]]

2022년 10월 12일 (수) 20:08 기준 최신판

남해 척화비
Anti-appeasement Stele, Namhae
남해 척화비,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대표명칭 남해 척화비
영문명칭 Anti-appeasement Stele, Namhae
한자 南海 斥和碑
주소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410-18번지
지정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6호
지정일 1997년 12월 31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남해 척화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척화비는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이다.

남해에 처음 척화비를 세웠던 곳은 노량 선착장 입구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무관심 속에 묻혀 있던 것을 해방 후 마을 사람들이 설천중학교 입구로 옮겨 보전하였다. 그 뒤 1998년 8월 남해군과 남해문화원에서 원래 자리와 가까운 마을 안으로 옮겼다가, 남해 충렬사 성역화 사업이 끝나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남해 척화비는 낮은 사각 받침돌 위에 몸돌이 있고 맨 위에 지붕돌이 올려져 있는 형태로, 다른 척화비와는 모습이 달라 지방 관청에서 대원군의 척화비를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를 크게 새긴 다음 그 왼쪽에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戒我萬年子孫).’는 작은 글자를 덧붙였다.

1882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뒤, 조선이 문호를 열게 되면서 척화비는 대부분 철거하였는데 지금까지 전국에 남아 있는 20여 기는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영문

Anti-appeasement Stele, Namhae

This is one of the many anti-appeasement steles set up across the country in 1871.

Following devastating armed conflicts on Korean soil with France in 1866 and the United States in 1871, Heungseon Daewongun (1820-1898), the prince regent and de facto ruler during the early period of King Gojong’s reign (r. 1863-1907), ordered these steles be erected to warn people against opening Korea to Western powers. Each stele bears twelve Chinese characters, reading, “The Western barbarians have invaded. To not fight is to advocate peace. To advocate peace is to sell out the country.” Next to this admonition are small characters which read, “Let this be a warning to our offspring for the next ten-thousand years.” After King Gojong took control of state affairs, Korea opened itself to foreign exchange, and most such steles were taken down. Over 20 of them have survived to this day and were designated as cultural heritages.

This anti-appeasement stele was originally erected at the entrance to Noryang Harbor, but in the second half of the 20th century, it was moved by the local people to the entrance of Seolcheon Middle School. In 1998, it was moved back to the area near its original site, and in 0000, it was moved once more to its current location. The stele consists of a rectangular pedestal, a body stone, and a roof-shaped capstone. It is presumed that this stele was erected by the local government office and was modeled on the steles erected by Heungseon Daewongun’s order.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1871년 전국에 세워졌던 여러 척화비 중 하나이다.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친부이자 당시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1820-1898)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등을 치른 뒤,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자 전국에 척화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를 크게 새겼고, 그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이러한 척화비는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된 후, 조선이 문호를 열게 되면서 대부분 철거되었다.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20여 기의 척화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남해에 처음 척화비를 세웠던 곳은 노량 선착장 입구였으나 20세기 후반 마을 사람들이 설천중학교 입구로 옮겼다. 1998년 원래의 자리와 가까운 곳으로 또 옮겼다가, 0000년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사각 받침돌,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방 관청에서 대원군의 척화비를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지금 위치로 옮긴 시기 확인 필요. 남해 충렬사 성역화 사업이 언제 끝났는지?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남해_척화비 Object 남해_척화비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와는 크기와 규모가 달라 지방관청이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척화비 Concept 척화비
병인양요 Event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 Event 신미양요(1871)
조선_흥선대원군 Actor 조선_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
L38-0266-0000 Heritage (경상남도_문화재자료_제266호)_남해_척화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6호로 지정되었다.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척화비 조선_흥선대원군 founder
척화비 병인양요 isRelatedTo
척화비 신미양요 isRelatedTo
남해_척화비 척화비 type
남해_척화비 L38-0266-0000 isDesignatedAs

참고자료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66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