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방초정"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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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천방초정.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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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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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초정은 방초 이정복(芳亭 李廷馥, 1575~1637)지은 정자이다. 1625년 경에 처음 정자를 세웠고, 이후 1689년에 이정복의 손자 이해(李垓)가 한 차례 고쳐 지었다. 원래는 지금의 위치보다 감천 가까이에 있었는데, 1736년 큰 홍수로 떠내려가 없어졌다가 1788년 이정복의 5대손 이의조(李宜朝)가 현재 위치로 옮겨 지었다. 방초정이 있는 상원리 원터마을은 연안이씨 집성촌으로, 이 정자는 선조를 추모하고 학문을 강론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건물은 조선 선조 때 부호군을 지낸 이정복이 1625년(인조 3년)에 건립한 정자이다. 그 후 1689년 퇴락한 것을 그의 손자 이해가 중건하고 1736년의 큰 홍수로 유실된 것을 1788년에 가례증해를 저술한 이의조가 3창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가운데 온돌방을 설치하고 사방으로 마루를 꾸몄다. 건물 중앙에 온돌방을 설치하는 구성은 호남지역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이 지역에서는 극히 드문 구성방식이다. 온돌방은 벽이 없이 사면을 창호로 둘렀고, 앞과 뒤로 출입문을 만들었다.
 
  
화강암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막돌로 초석을 놓아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온돌방을 구성하는 네 기둥을 제외하고는 둥근 기둥을 세웠다. 2층으로의 출입은 건물 왼쪽 중앙에 계단을 만들어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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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중앙에 온돌방을 두고 사방에 난간을 덧댄 마루를 낸 구조이다. 1층에는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있고, 건물 왼쪽에 출입을 위한 계단이 있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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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앞에는 ‘최씨담(崔氏潭)’이라고 부르는 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연못에는 이정복의 부인 화순 최씨와 몸종 석이의 이야기가 전한다. 17세의 나이로 이정복과 결혼한 최씨는 시댁에 들어가기도 전에 임진왜란을 겪었다. 죽더라도 시가에서 죽겠다고 결심한 최씨는 피난을 떠난 시댁 식구들을 찾아 나섰지만 이내 왜적에게 쫓기게 되었다. 결국 최씨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연못에 몸을 던졌고, 최씨를 따르던 석이 역시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초고====
 
이 정자는 조선 선조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이정복(李廷馥, 1575-1637, 호 방초)이 조선 인조 3년(1625) 경에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숙종 15년(1689)에 손자 이해(李垓, 1630-1698)가 중건하였고 영조 3년(1727)에 보수되기도 하였다.
 
  
1736년의 큰 홍수로 인해 유실된 것을 정조 12년(1788) 예학으로 이름을 떨쳤던 이정복의 5대손 이의조(李宜朝, 1727-1805)가 현재 위치로 옮겨 다시 짓고 강학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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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후 이정복은 부인을 그리워하면서 그녀가 몸을 던진 연못을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한 후, 이곳에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 방초정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방초정의 오른쪽에는 최씨의 정절을 기려 1632년 조정에서 하사한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정자는 중앙에 온돌방이 있고 사방에 난간을 덧댄 마루를 낸 형태이다. 온돌방 전체를 두른 창호는 필요할 경우 들어 올려서 전체를 트인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1층에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고, 건물의 서쪽에 출입을 위한 계단이 있으며, 처마 끝에는 지붕의 무게를 분산하기 위한 보조 기둥을 길게 세웠다.
 
 
 
정자 앞에는 2개의 인공섬을 둔 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최씨담(崔氏潭)’이라고 부르는 이 연못에는 인조 10년(1632) 정려를 받은 이정복의 부인 화순최씨(和順崔氏)와 그녀의 몸종 석이(石伊)의 이야기가 전한다.*
 
 
 
최씨는 임진왜란 때 피난을 떠난 시댁 식구들을 찾아 나섰다가 왜적에게 쫓기게 되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연못에 투신했고, 석이는 주인을 따라 자결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이정복은 부인 최씨를 그리워하면서 그녀가 몸을 던진 연못을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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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담(崔氏潭) 이야기 : 17세의 나이로 이정복과 결혼한 최씨는 혼인 1년 만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상원리의 시댁으로 향했다. 그녀는 피난을 떠난 시댁 식구를 찾아 나섰다가 왜병에게 쫓기게 되었고, 연못에 투신해 정절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그녀의 몸종 석이도 주인을 따라 투신해 죽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이정복은 최씨가 투신한 연못을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고, 방호정을 세워 그녀를 기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방호정 옆에 최씨의 정려각이 있다. 최씨는 1632년에 정려(旌閭)를 받았으며, 인조가 손수 쓴 정려문을 하사했다. 1764년에 정문(旌門)을 세웠고, 1812년에 여각을 고쳐 지었다. 정려각 앞에는 몸종 석이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1975년 연못을 보수하면서 발견된 것이다.
 
*정자가 있는 상원리는 연안이씨의 집성촌이다.
 
*이정복이 이 정자를 지은 이유에 대해서는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결한 부인을 추모하며 지었다는 설이 있다.
 
 
 
====1차 수정====
 
방초정은 방초 이정복(芳草 李廷馥, 1575~1637)이 1625년 경에 지은 정자이다. 원래는 지금의 위치보다 감천 가까이에 있었다고 한다. 1689년에 손자 이해(李垓, 1630~1698)가 중건하였고, 1736년 큰 홍수로 유실되었다가, 1788년 이정복의 5대손 이의조(李宜朝, 1727~1805)가 현재 위치로 옮겨 지었다. 방초정이 있는 상원리는 연안이씨가 대대로 살고 있는 마을이며, 이 정자는 가문의 후손들을 가르치거나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정자는 중앙에 온돌방이 있고 사방에 난간을 덧댄 마루를 낸 형태이다. 1층에는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고, 건물 왼쪽에 출입을 위한 계단이 있다.
 
 
 
정자 앞에는 ‘최씨담(崔氏潭)’이라고 부르는 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이 연못에는 이정복의 부인 화순최씨(和順崔氏)와 그녀의 몸종 석이(石伊)의 이야기가 전한다. 17세의 나이로 이정복과 결혼한 최씨는 시댁에 들어가기도 전에 임진왜란을 만났다. 죽더라도 시가에서 죽겠다고 결심한 최씨는 피난을 떠난 시댁 식구들을 찾아 나섰지만, 결국 왜적에게 쫓기게 되었고 정절을 지키기 위해 연못에 몸을 던졌다. 최씨를 따르던 석이 역시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이정복은 부인을 그리워하면서 그녀가 몸을 던진 연못을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고 한다. 방초정의 오른쪽에는 최씨의 정절과 석이의 충절을 기려 1632년 조정에서 하사한 정려비가 세워져 있다.  
 
  
 
===영문===
 
===영문===
 
'''Bangchojeong Pavilion, Gimcheon'''
 
'''Bangchojeong Pavilion, Gimcheon'''
  
Bangchojeon Pavilion was first built around 1625 by Yi Jeong-bok (1575-1637; pen name: Bangcho) and is said to have originally been located closer to the nearby Gamcheon Stream than its current location. In 1689, the pavilion was rebuilt by Yi Jeong-bok's grandson Yi Hae (1630-1698), but the building was lost in a large flood in 1736. In 1788, the building was rebuilt in its current location by Yi Ui-jo (1727-1805), the 5th-generation descendant of Yi Jeong-bok. Since then, the pavilion has undergone several repairs and renovations. Sangwon-ri Village, where this pavilion is located, is a clan village of the Yeonan Yi Clan. This pavilion was used by the clan as a place to educate their descendants and hold family mee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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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gchojeong Pavilion was first built around 1625 by Yi Jeong-bok (1575-1637, pen name: Bangcho). In 1689, the pavilion was rebuilt by Yi Jeong-bok’s grandson Yi Hae (1630-1698) but was lost in a large flood in 1736. In 1788, it was rebuilt by Yi Ui-jo (1727-1805), the 5th-generation descendant of Yi Jeong-bok. Since then, the pavilion has undergone several repairs and renovations. Wonteo Village, where this pavilion is located, is a clan village of the Yeonan Yi Clan. This pavilion was used by the clan as a place to educate their descendants and hold family mee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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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vilion consists of an elevated wooden floor enclosed with balustrades and an underfloor-heated room in the center. The room is heated by a fireplace built below it, and its walls can be raised and fastened to the roof to open up the entire space.  
  
The pavilion consists of an elevated wooden floor enclosed with balustrades and an underfloor-heated room in the center. The room is heated by a fireplace built below it, and its walls can be raised and fastened to the roof to open up the entire space. The pavilion's hip-and-gable roof is particularly large, and its eaves are thus supported with posts at the cor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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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ront of the pavilion is a square lotus pond named Choessidam, meaning the “Pond of Lady Choe.” This pond is related to the story of Yi Jeong-bok’s wife, Lady Choe of the Hwasun Choe Clan, and her maid Seogi. Shortly after Lady Choe married Yi Jeong-bok,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 broke out. Lady Choe, only 17 years old, was determined that if she were to die in the war, she would do so at her in-laws’ house. So she and her maid Seogi fled together from her home village of Haro, which is around 10 km to the northeast of Sangwon-ri. However, on the way, she was chased by the Japanese invaders, and rather than allowing herself to be captured by the enemy, she committed suicide by drowning herself in this pond. Seogi followed suit and committed suicide as well. It is said that after the war ended, Yi Jeong-bok renovated the pond to its current appearance to honor his late wife’s memory.
  
In front of the pavilion is a square lotus pond called Choessidam, meaning "Pond of Lady Choe." This pond is related to the story of Yi Jeong-bok's wife, Lady Choe of the Hwasun Choe Clan, and her maid Seogi. Less than a year after Lady Choe married Yi Jeong-bok,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 broke out. She had not yet moved in with her in-laws, as it was tradition for the couple to spend some time with the bride's family before moving in with the grooms's family. Lady Choe, only 17 years old, was determined that if she were to die in the war, she would do so at her in-laws' house. Her husband was away guarding the family cemetary, and so she and her maid Seogi fled together from her home village, which is around 10 km to the northeast, to Sangwon-ri. However, on the way, she was chased by the Japanese invaders, and rather than allowing herself to be captured by the enemy, she commited suicide by drowning herself in this pond. Seogi followed suit and commited suicide as well. It is said that after the war ended, Yi Jeong-bok renovated the pond to its current appearance to honor his late wife's memory. To the right of Bangchojeong Pavilion are two steles. One was bestowed by the government in 1623 to commemorate the matrimonial devotion of Lady Choe, and the other was erected by the Yi family to commemorate the loyalty of the maid Seo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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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the right of Bangchojeong Pavilion are two pavilions that enshrine commemorative steles. The stele on the left was bestowed by the government in 1632 to commemorate the matrimonial devotion of Lady Choe. In front of the pavilion is a small stone monument that was erected by the Yi family to commemorate the loyalty of the maid Seo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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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국문초안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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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2일 (화) 09:25 기준 최신판

김천 방초정
Bangchojeong Pavilion, Gimcheon
김천 방초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김천 방초정
영문명칭 Bangchojeong Pavilion, Gimcheon
한자 金泉 芳草亭
주소 경상북도 김천시 상좌원1길 41 (구성면)
지정번호 보물 제2047호
지정일 2019년 12월 30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김천 방초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방초정은 방초 이정복(芳亭 李廷馥, 1575~1637)이 지은 정자이다. 1625년 경에 처음 정자를 세웠고, 이후 1689년에 이정복의 손자 이해(李垓)가 한 차례 고쳐 지었다. 원래는 지금의 위치보다 감천 가까이에 있었는데, 1736년 큰 홍수로 떠내려가 없어졌다가 1788년 이정복의 5대손 이의조(李宜朝)가 현재 위치로 옮겨 지었다. 방초정이 있는 상원리 원터마을은 연안이씨 집성촌으로, 이 정자는 선조를 추모하고 학문을 강론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중앙에 온돌방을 두고 사방에 난간을 덧댄 마루를 낸 구조이다. 1층에는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있고, 건물 왼쪽에 출입을 위한 계단이 있다.

정자 앞에는 ‘최씨담(崔氏潭)’이라고 부르는 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이 연못에는 이정복의 부인 화순 최씨와 몸종 석이의 이야기가 전한다. 17세의 나이로 이정복과 결혼한 최씨는 시댁에 들어가기도 전에 임진왜란을 겪었다. 죽더라도 시가에서 죽겠다고 결심한 최씨는 피난을 떠난 시댁 식구들을 찾아 나섰지만 이내 왜적에게 쫓기게 되었다. 결국 최씨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연못에 몸을 던졌고, 최씨를 따르던 석이 역시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이정복은 부인을 그리워하면서 그녀가 몸을 던진 연못을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한 후, 이곳에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 방초정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방초정의 오른쪽에는 최씨의 정절을 기려 1632년 조정에서 하사한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영문

Bangchojeong Pavilion, Gimcheon

Bangchojeong Pavilion was first built around 1625 by Yi Jeong-bok (1575-1637, pen name: Bangcho). In 1689, the pavilion was rebuilt by Yi Jeong-bok’s grandson Yi Hae (1630-1698) but was lost in a large flood in 1736. In 1788, it was rebuilt by Yi Ui-jo (1727-1805), the 5th-generation descendant of Yi Jeong-bok. Since then, the pavilion has undergone several repairs and renovations. Wonteo Village, where this pavilion is located, is a clan village of the Yeonan Yi Clan. This pavilion was used by the clan as a place to educate their descendants and hold family meetings.

The pavilion consists of an elevated wooden floor enclosed with balustrades and an underfloor-heated room in the center. The room is heated by a fireplace built below it, and its walls can be raised and fastened to the roof to open up the entire space.

In front of the pavilion is a square lotus pond named Choessidam, meaning the “Pond of Lady Choe.” This pond is related to the story of Yi Jeong-bok’s wife, Lady Choe of the Hwasun Choe Clan, and her maid Seogi. Shortly after Lady Choe married Yi Jeong-bok,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 broke out. Lady Choe, only 17 years old, was determined that if she were to die in the war, she would do so at her in-laws’ house. So she and her maid Seogi fled together from her home village of Haro, which is around 10 km to the northeast of Sangwon-ri. However, on the way, she was chased by the Japanese invaders, and rather than allowing herself to be captured by the enemy, she committed suicide by drowning herself in this pond. Seogi followed suit and committed suicide as well. It is said that after the war ended, Yi Jeong-bok renovated the pond to its current appearance to honor his late wife’s memory.

To the right of Bangchojeong Pavilion are two pavilions that enshrine commemorative steles. The stele on the left was bestowed by the government in 1632 to commemorate the matrimonial devotion of Lady Choe. In front of the pavilion is a small stone monument that was erected by the Yi family to commemorate the loyalty of the maid Seogi.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방초정 Place 방초정(芳草亭)
이정복 Actor 이정복(李廷馥,_1575-1637)
이해 Actor 이해(李垓_1630-1698) 이정복의 손자이다. 방초정을 중건 및 보수하였다고 전한다.
이의조 Actor 이의조(李宜朝,_1727~1805) 이정복의 5대손(현손)으로, 조선 후기 영남 노론 학단을 대표하는 예학자이다.
가례증해 Record 가례증해(家禮增解) 이의조가 부친의 유명을 따라 13년 동안 저술해 9권 10책 분량으로 완성한 책.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우리나라 제가설(諸家說)을 열거하여 증해하고 자가설(自家說)을 첨가하여 엮은 해설서이다.
연안이씨 Concept 연안이씨(延安李氏)
1736년_홍수 Event 1736년_홍수 이해가 중건한 정자가 이때의 홍수로 유실되었다.
화순최씨 Actor 화순최씨(和順崔氏) 이정복의 부인이다.
순이 Actor 순이 최씨의 몸종이다.
임진왜란 Event 임진왜란(1592)
이윤적 Actor 이윤적(李胤積) 이의조의 아버지이다. 도암 이재의 문하에서 예학을 배운 뒤 숭례처사라고 불릴 정도로 예를 중시하는 삶을 보냈다.
최씨담 Place 최씨담(崔氏潭) 화순최씨와 몸종 석이가 자결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방초정 앞의 사각형 연못.
이정복_처_화순최씨_정려각 Place 이정복_처_화순최씨_정려각(李廷馥_妻_和順崔氏_旌閭閣) 1632년(인조 10)에 정려(旌閭)가 내리고 인조가 손수 쓴 정려문을 하사했다. 1764년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1812년(순조 12)에 여각을 고쳐 짓고 현재에 이르렀다.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방초정 이정복 constructor
방초정 이해 reconstructor
방초정 이의조 reconstructor
방초정 1736년_홍수 isDamagedBy
방초정 이정복 isNamesakeOf
이정복 화순최씨 hasWife
화순최씨 순이 hasOwner
최씨담 화순최씨 isRelatedTo
최씨담 순이 isRelatedTo
이정복_처_화순최씨_정려각 화순최씨 commemorates
이정복_처_화순최씨_정려각 방초정 isNear
화순최씨 임진왜란 isRelatedTo
이정복 이해 hasGrandSon
이정복 이의조 hasDescendant
이윤적 이의조 hasSon
이정복 연안이씨 member
이해 연안이씨 member
이윤적 연안이씨 member
이의조 연안이씨 member
가례증해 이의조 creator
가례증해 이윤적 isRelatedTo

참고자료

  • 수백년간 연못에 수장된 비석의 정체,오마이뉴스, 2019.12.23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97342 -> 정려각 옆에 비각이 하나 더 나란히 서 있다. 1937년에 세운 풍기 진씨의 열행비(烈行碑)다. 풍기 진씨(1912~1935)는 이정복의 후손 이기영의 처다. 열여덟에 이기영과 혼인했는데 늑막염으로 고생하던 남편이 친정에서 복막염으로 숨지자, 치료를 제대로 못 해준 자기 탓으로 여겼다. 진씨는 남편의 시신 옆에 가 반듯이 누워 일체의 음식을 거부하다가 결국, 그 방에서 굶어 죽었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전국 각 유림에서 애도문과 제문, 만사 등을 보내왔으며 이태 후에 정려를 세워 후세인의 본보기로 하였다는 게 <영남삼강록>과 <충의효열지> 열부 편에 전하는 내용이다.
  • 김천 방초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720470000&pageNo=1_1_1_1 → 문화재 정보 확인 (문화재청 안내문안 - 회의록 내 문화재 지정 의견 요약된 내용) ; 방초정 앞 최씨담(崔氏潭)은 현재까지 알려진 국내 지당 중 방지쌍원도(方池雙圓島)의 전형을 오롯이 간직한 유일한 정원 유구로 마을과 감천 사이에 놓여 마을의 오수나 유출수를 재처리 여과하는 수질 정화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생태 환경적 기능도 함께 지니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음. [최씨담(崔氏潭): 방초정 앞에 있는 연못으로 임진왜란에 화순최씨(방초정 건립자 이정복의 처)가 친정에서 시가로 오다가 왜병에 쫒기어 정절을 지키려고 이 못에 투신했고, 노비 석이(石伊)도 뒤를 따라 투신했는데 석이의 비석이 근래 이 못에서 발견됨.]
  • 방초정, 디지털김천문화대전 http://gimcheon.grandculture.net/gimcheon/toc/GC03200623 → 문화재 정보 확인
  • 2019년 제13차 건축분과 문화재위원회 회의록, 문화재청 → 이정복은 18세 때 성묘 도중 임진왜란이 터져 지례 능지산(陵旨山) 선영(先塋) 아래에서 피난하던 중 선조가 피난길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곧 현지로 달려가 임금을 시종하려 했으나 이미 적이 사방에 깔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십오공신희맹록(十五功臣會盟錄)에 공신으로 기록되었고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김천승(金泉丞)이란 보직을 내렸으나 사양하였다. 후에 잠시 출사하여 벼슬은 부호군(副護軍, 종4품)을 역임하였으며 귀향 후 유학에만 전념하였다. 이정복은 이런 와중에도 방초정을 조영하였고 이곳에서 석학들과 교류하며 강학과 후학 양성에 매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 이후 1974년 12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고, 1988년 보수공사, 2003년 정비공사, 2004년 보수공사, 2007년에 주변정비공사가 있었다.
→ 방초정의 구조와 조형을 살펴보면, 중재실형(中齋室型)으로 영남에는 흔하지 않은 특이성으로 보아 노론계열 가문으로 전라도나 충청도 지역 학자들과의 교류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되므로 연구에 의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