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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초려 이유태(李惟泰, 1607~1684)가 말년에 후학을 가르치고 독서로 여생을 보냈던 곳으로 현재 고택과 이유태를 제향한 용문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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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서원의 유래는 이유태가 저술활동을 하고 제자를 가르쳤던 중동서재(中洞書齋)와 용문서재(龍門書齋)에서 비롯되었다. 중동서재는 이유태가 거주하던 집이었고, 용문서재는 현재 용문서원과 종가가 있는 자리에 있던 것으로 주로 이유태의 문하생들이 거주하면서 공부한 곳이다. 용문서재는 후손인 이재원(李在元, 1773~1841)이 용문서사(龍門書社)라 이름을 고치고 잠시 이유태를 제향하기도 하였으나 관의 허락없이 제사를 지낸 것이 문제가 되어 중단되었는데 이것이 용문서원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이유태가 말년을 보내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세거해 온 공주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유림과 후손들이 용문서재가 있던 자리에 서원을 세울 것을 합의하였고 마침내 1986년 용문서원이 창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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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태는 현종·숙종대의 문인이자 학자로 송준길, 송시열, 윤선거, 유계와 함께 충청오현으로 일컬어졌다. 1675년(숙종 1) 복상 문제로 제2차 예송[甲寅禮訟]*이 일어나자 남인의 배척을 받아 영변에 유배되었다. 유배 이후 중동골에서 거주하면서 용문서재(龍門書齋), 사송서재(四松書齋), 중동서재(中洞書齋) 등을 세워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이후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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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예송 : 갑인예송(甲寅禮訟)은 1674년(현종 15) 2월 효종(孝宗)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국상이 일어나자, 시어머니 자의대비(慈懿大妃, 趙大妃)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예송(禮訟) 사건이다. 일명, ‘제2차 예송’이라고도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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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공주 이유태 유허지’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331296&cid=40942&categoryId=37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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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전자대전 ‘공주 이유태 유허지’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580797&cid=51898&categoryId=5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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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공주 이유태 유허지’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3413403900000
  
  

2021년 4월 23일 (금) 13:26 판


공주 이유태 유허지
공주 이유태 유허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공주 이유태 유허지
한자 公州 李惟泰 遺虛地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중등골길 54-7 (상왕동, 외 9필지)
지정번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90호
지정일 2004년 10월 30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생활유적
수량/면적 4588
웹사이트 공주 이유태 유허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곳은 초려 이유태(李惟泰, 1607~1684)가 말년에 후학을 가르치고 독서로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이유태는 현종‧숙종 대의 문인으로 특히 현종 때 학덕이 높은 유학자로 크게 활약하였으며, 송준길, 송시열, 윤선거, 유계와 함께 충청오현(忠淸五賢)으로 일컬어졌다. 숙종 1년(1675) 복상 문제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남인의 배척을 받아 영변에 유배되었다. 유배 이후 중동골에서 거주하면서 용문서재(龍門書齋), 사송서재(四松書齋), 중동정사(中洞精舍) 등을 세워 후학을 가르치고 독서로 여생을 보냈다. 현재는 고택과 선생을 제향한 용문서원(1986년 건립)이 남아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초려 이유태(李惟泰, 1607~1684)가 말년에 후학을 가르치고 독서로 여생을 보냈던 곳으로 현재 고택과 이유태를 제향한 용문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용문서원의 유래는 이유태가 저술활동을 하고 제자를 가르쳤던 중동서재(中洞書齋)와 용문서재(龍門書齋)에서 비롯되었다. 중동서재는 이유태가 거주하던 집이었고, 용문서재는 현재 용문서원과 종가가 있는 자리에 있던 것으로 주로 이유태의 문하생들이 거주하면서 공부한 곳이다. 용문서재는 후손인 이재원(李在元, 1773~1841)이 용문서사(龍門書社)라 이름을 고치고 잠시 이유태를 제향하기도 하였으나 관의 허락없이 제사를 지낸 것이 문제가 되어 중단되었는데 이것이 용문서원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이유태가 말년을 보내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세거해 온 공주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유림과 후손들이 용문서재가 있던 자리에 서원을 세울 것을 합의하였고 마침내 1986년 용문서원이 창건되었다.

이유태는 현종·숙종대의 문인이자 학자로 송준길, 송시열, 윤선거, 유계와 함께 충청오현으로 일컬어졌다. 1675년(숙종 1) 복상 문제로 제2차 예송[甲寅禮訟]*이 일어나자 남인의 배척을 받아 영변에 유배되었다. 유배 이후 중동골에서 거주하면서 용문서재(龍門書齋), 사송서재(四松書齋), 중동서재(中洞書齋) 등을 세워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이후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 갑인예송 : 갑인예송(甲寅禮訟)은 1674년(현종 15) 2월 효종(孝宗)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국상이 일어나자, 시어머니 자의대비(慈懿大妃, 趙大妃)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예송(禮訟) 사건이다. 일명, ‘제2차 예송’이라고도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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