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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영등성은 경상우수영 소속의 수군진성으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종 21년(1490)에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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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진은 거제부 소속으로 종4품의 무관인 만호(萬戶)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는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되었다. 이후 인조 원년(1623) 영등진을 둔덕면 학산리로 옮기면서 이곳을 구영등(舊永登)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영등은 거제도의 가장 북쪽으로 진해, 웅천, 가덕도 등 육지와 가장 가깝게 접하고 있으며, 주변에 영등왜성, 구율포성 등 성곽유적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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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영등성은 위에서 보았을 때 전체적으로 타원형을 이룬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둘레 550m, 높이 3m 정도로, 대부분 훼손되고 일부 기단부만 남아 있다. 남쪽과 북쪽 두 곳에 각각 성문을 설치하였는데, 해안 쪽 출입로인 북문지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반원형으로 덧댄 옹성(甕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쪽 세 곳에는 성벽에 붙어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네모꼴로 성벽에 덧대어 쌓은 치성(雉城)도 일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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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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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0일 (일) 12:20 판


거제 구영등성
거제 구영등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거제 구영등성
한자 巨濟 舊永登城
주소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1249번지 외
지정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205호
지정일 1998년 11월 13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수량/면적 24,497
웹사이트 거제 구영등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성은 1490년(성종21)에 왜구倭寇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았다. 이후 왜구倭寇의 침략을 받아 성이 크게 훼손된 것을 임진왜란 때 다시 수리하였다. 그후 1623(인조 원년)에 지금의 영등永登으로 군진軍鎭을 옮기면서, 이성은 구영등성舊永登城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터는 해안에 위치한 구영마을 남쪽의 야산 기슭 평면에 원추형으로 조성되어 있다. 성벽은 대부분 훼손되고, 겨우 받침대基壇部 부분만 남아 있지만, 성의 구조와 쌓은 방법 등은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다.

남북 양쪽에 반원형의 성문이 있고, 성문 위에는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낮은 담雉城(성가퀴)이 설치되어 있다. 성문의 입구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작은 성을 쌓아 외부로부터 엄폐하였다.

또한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한 도량垓字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지형의 변형으로 지금은 확인이 불가능하다. 성을 쌓는 방법은 조선 전기의 일반 평지에 쌓은 읍성과 같은 형태이며, 외벽은 자연석으로 겉쌓기를 하고 내벽은 막돌로 쌓은 뒤 내벽과 외벽 사이를 크고 작은돌들로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문헌에 의하면 성의 규모는 둘레가 약 320m정도 였다고 한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성은 조선시대 성종 21년(1490)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방어의 목적으로 쌓은 것이다.

거제부 소속의 영등포영(永登浦營)이 있던 곳으로 종4품의 무관인 만호(萬戶)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되었고, 이후 인조 원년(1623) 둔덕면 영등진으로 옮겼다. 그 후 이곳을 구영등(舊永登)이라 하고, 둔덕면에 있는 것을 영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곳 구영등은 거제도의 가장 북쪽으로 진해, 웅천, 가덕도 등 육지와 가장 가깝게 접하고 있으며, 주변에 영등왜성, 구율포성 등 성곽유적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현재 성벽은 대부분 훼손되고 일부 기단부만 남아 있는 상태이지만 성의 구조와 쌓은 방법 등은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다. 남북 양쪽에 반원형으로 된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그 출입문이 한쪽 옆에 있다. 성의 바깥벽은 큰 돌로 쌓고 안쪽 벽은 돌을 지면에 겹쳐 쌓은 뒤 크고 작은 돌을 차곡차곡 쌓은 방식으로, 일반적인 조선 전기 평지읍성의 축조 방식을 사용하였다.

1차 수정

구영등성은 조선시대인 성종 21년(1490)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방어의 목적으로 쌓은 것이다.

거제부 소속의 영등포영(永登浦營)이 있던 곳으로 종4품의 무관인 만호(萬戶)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되었고, 이후 인조 원년(1623) 둔덕면 영등진으로 옮겼다. 그 후 이곳을 구영등(舊永登)이라 하고, 둔덕면에 있는 것을 영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구영등은 거제도의 가장 북쪽으로 진해, 웅천, 가덕도 등 육지와 가장 가깝게 접하고 있으며, 주변에 영등왜성, 구율포성 등 성곽유적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현재 성벽은 대부분 훼손되고 일부 기단부만 남아 있는 상태이지만 성의 구조와 쌓은 방법 등은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다. 남북 양쪽에는 반원형으로 된 옹성을 쌓았고, 옹성 한쪽 옆에 출입문을 두었다. 성의 바깥벽은 큰 돌로 쌓고 안쪽 벽은 돌을 지면에 겹쳐 쌓은 뒤 크고 작은 돌을 차곡차곡 쌓은 방식으로, 일반적인 조선 전기 평지읍성의 축조 방식을 사용하였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수정사항 없음.
  2. 분야별 자문위원 2
    • 구영등진성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1490년(성종 21)에 둘레 1,068척, 높이 13척 규모로 쌓은 경상우수영 소속의 수군진성이다. 종4품의 무관인 만호(萬戶)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는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되었다. 이후 1623년(인조 원년) 둔덕면 학산리로 영등진을 옮기면서 이곳을 구영등진성(舊永登鎭城)으로 부르게 되었다.
    • 구영등진성의 전체적인 성벽 선은 위에서 보았을 때 타원형을 이루며, 현재 성벽은 대부분 훼손되고 일부 기단부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성벽은 석축으로 둘레 550m, 높이 3m 정도로 남아 있다. 남·북 두 곳에 각각 성문을 설치하였는데 현재 해안 쪽 출입로인 북문지의 경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반원형으로 덧댄 옹성(甕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쪽 세 곳에는 성벽에 붙어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네모꼴로 성벽에 덧대어 쌓은 치성(雉城)도 일부 남아 있다.
    • 성내 중심부에는 임진왜란 때 쌓은 일본식 성벽이 남아 있어 산 쪽 영등왜성과 관련하여 이곳에도 왜군이 주둔한 것으로 보인다.
    • 붉은색 글자 -> 수정 내용 제시
  1.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수정의견 없음

2차 수정

구영등성은 경상우수영 소속의 수군진성으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종 21년(1490)에 쌓았다.

영등진은 거제부 소속으로 종4품의 무관인 만호(萬戶)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는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되었다. 이후 인조 원년(1623) 영등진을 둔덕면 학산리로 옮기면서 이곳을 구영등(舊永登)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영등은 거제도의 가장 북쪽으로 진해, 웅천, 가덕도 등 육지와 가장 가깝게 접하고 있으며, 주변에 영등왜성, 구율포성 등 성곽유적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구영등성은 위에서 보았을 때 전체적으로 타원형을 이룬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둘레 550m, 높이 3m 정도로, 대부분 훼손되고 일부 기단부만 남아 있다. 남쪽과 북쪽 두 곳에 각각 성문을 설치하였는데, 해안 쪽 출입로인 북문지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반원형으로 덧댄 옹성(甕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쪽 세 곳에는 성벽에 붙어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네모꼴로 성벽에 덧대어 쌓은 치성(雉城)도 일부 남아 있다.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