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화유옹주 묘
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화유옹주(和柔翁主, 1740~1777)는 조선의 왕족으로, 영조의 10녀이며 어머니는 귀인 조씨이다. 1740년(영조 16년) 9월 29일, 영조와 숙원조씨(淑媛趙氏, 귀인조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752년(영조 28년) 10월 5일, 호조참판(戶曹參判) 황자(黃梓)의 아들인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과의 혼인이 결정되었으나, 그해 11월 화협옹주가 사망하자 영조는 화유옹주의 길례를 중지할 것을 명하였고, 14살이 된 1753년(영조 29년) 2월 27일, 황인점과 혼인하여 2년 후 출궁하였다. 이후에도 영조는 여러 차례 화유옹주의 저택에 친림하였고, 1777년(정조 1년) 5월 21일, 38세의 나이에 졸하였다.
화유옹주의 태비와 태실은 충청남도 당진군 순성면 성북리 태봉산에 있었으나, 현재는 충청남도 당진군 순성초등학교 교정에 위치하고 있다.
묘역은 본래 부천시 작동 산126번지에 곡장(曲墻)을 두르고 옥개형 묘비와 혼유석, 상석, 향로석 등을 갖추고 있었으나, 1991년 6월 부천시 작동 산28-6번지로 이장하였고, 다시 2005년 6월 부천시 여월동 산32번지로 이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1년 6월 이장 발굴조사에서 장신구와 도자기류, 생활용품 등 궁중과 반가의 유물 30여점이 출토되었고, 현재는 서울시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과 부천시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출처 : 부천시 향토문화재 지정 자료(2021.07.28.
수정 국문
초안
조선의 21대 임금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10번째 딸 화유옹주(和柔翁主, 1740~1777)의 무덤이다.
화유옹주는 숙원 조씨(淑媛 趙氏, 훗날의 귀인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영조 29년(1753) 황인점(黃仁點, 1732~1802)과 혼인하여 2년 후 출궁하였다.
봉분은 남편 황인점과의 합장묘이다. 본래 묘역은 작동 126번지에 있었는데, 1991년 도로를 확장하면서 작동 산 28-6번지로 이장하였고, 석물 없이 봉분만 남아 있었던 것을 2005년 6월 지금의 자리로 다시 이장하면서 봉분을 감싸는 낮은 담장을 두른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현재 봉분 앞에는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등의 석물이 세워져 있고, 묘역을 표시하는 망주석 1쌍은 무덤 오른쪽에 나란히 있는 어머니 귀인조씨의 묘(향토유적 제6호)와 영역을 공유하고 있다.
한편, 첫 번째 이장을 위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부부가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신구와 도자기류, 생활용품 등의 유물 30여 점이 출토되었다. 이때 수습된 유물들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부천시립박물관 내의 부천향토역사관에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 영조의 여러 딸 중 정조가 즉위한 직후 궁에 출입할 수 있었던 옹주는 화유옹주 뿐이었다고 한다.
- 화유옹주의 태비와 태실은 충청남도 당진군 순성면 성북리 태봉산에 있었으나, 현재는 충청남도 당진군 순성초등학교 교정에 위치하고 있다.
1차 수정
조선 제21대 왕 영조(1724~1776 재위)의 10번째 딸 화유옹주(和柔翁主, 1740~1777)와 남편 황인점의 합장묘이다. 화유옹주는 영조와 귀인조씨(貴人趙氏, 1707~1780)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영조 29년(1753) 호조참판 황자(黃梓, 1689~?)의 아들 황인점(黃仁點, ?~1802)과 혼인하였다.
이 묘는 원래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2km 떨어진 작동에 있었다. 1991년 인근의 도로를 확장하면서 한번 자리를 옮겼고, 2005년 현재 위치로 다시 옮기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봉분 주위에는 낮은 담을 둘렀고, 봉분 앞에는 묘비, 혼이 나와 노닌다는 혼유석, 제물을 차려 놓는 상석, 향로를 올려놓는 향로석 등을 갖추었다. 오른쪽에는 어머니 귀인조씨의 묘가 있다.
1991년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부부가 생전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신구, 도자기, 생활용품 등의 유물 30여 점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18세기 조선의 궁중과 양반들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로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