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후산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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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기존 문안 없음.

수정 국문

초고

후산정사는 조선시대의 학자 후산 이종수(后山 李宗洙, 1722~1797)가 정조 4년(1780)에 지은 서재에서 비롯되었다. 이종수는 집의 뒷산에 독서와 학문 수양을 위한 건물을 짓고 ‘산천재(山泉齋)’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종수는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1711~1781)의 제자로, 조선시대의 저명한 성리학자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2~1570)의 학문을 계승한 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온돌방 앞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마루는 바닥을 살짝 띄우고 난간을 둘러 누마루 형태로 꾸몄으며, 양쪽 끝에는 나무판자를 벽처럼 세웠다. 건물 오른쪽에 출입을 위한 계단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2001년에 보수된 것이며, 정사 건물 오른쪽 앞에 있는 사당도 이때 새로 지었다.

  • 언제부터 ‘후산정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인지 확인 필요 (이종수는 이곳을 ‘산천재(山泉齋)’라고 불렀음.)
  • 이종수의 호 후산은 스승(대산)이 자신의 뒤를 이어가라는 의미를 담아 지어준 것이다.
  • 1818년에 개축하면서 기와지붕을 올렸다고 한다.

1차 수정

후산정사는 조선시대의 학자 이종수(李宗洙, 1722~1797)를 기리기 위해 순조 18년(1818)에 지었다. 원래 이곳에는 이종수가 생전에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정조 4년(1780)에 지은 산천재(山泉齋)라는 서재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정사 건물은 2001년에 보수된 것이며, 정사 오른쪽 앞에 있는 사당도 이때 새로 지었다.

이종수는 안동 출신의 저명한 학자인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1711~1781)과 소산 이광정(小山 李光靖, 1714~1789) 형제의 제자이다. ‘대산과 소산의 뒤를 이을 인물’이라는 뜻으로 이상정이 ‘후산(后山)’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종수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2~1570)의 학문을 계승하여 평생 학문을 닦고 제자를 가르치는 데 힘썼다.

정사 건물은 3개의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방 앞쪽에는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두었다. 누마루 양쪽 끝에는 나무판자로 만든 출입문을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