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고성이씨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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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2016 국문

이 비는 조선 태종(太宗) 때 철성군(鐵城君)에 봉해진 용헌(容軒) 이원(李原)의 아들 이증(李增)의 신도비이다. 세운지 오래되어 비면이 심하게 마멸된 것을 순조(純祖) 18년(1818)에 다시 돌을 깎아 비문의 일부를 개찬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 안동시 월곡면 미질동에 있었으나, 1973년 안동댐의 건설로 인하여 예안면 기사리로 옮겼다가 2000년에 현재의 위치에 다시 옮겼다.

비면의 너비는 86.7cm이며, 비신의 높이는 213cm이다. 비각은 사방 단간의 팔작지붕인데, 둥근 기둥에 2익공(翼工)으로 굴도리를 받쳐 올린 단아한 모양의 집이다. 그 규모와 각 부재의 규격, 익공 조각의 솜씨에서부터 처마허리의 늘씬함과 추녀의 솟음에 이르기까지의 적절한 조화와 아름다움은 이 비각 보존의 필요성을 높여주고 있다. 비 표면에 5행 55자의 제액(題額)이 해서(楷書)로 음각되어 있으며, 비음(碑陰)에는 전체 22행(각행 65자)의 비문이 해서로 음각되어 있다.

2021 국문

초안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이다. 이 비석은 고성이씨 가운데 안동에 처음 들어온 이증(李增, 1419~1480)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처음 세웠던 비석이 세월이 흘러 심하게 마멸되자, 비문 일부를 수정하고 다시 새겨 1818년 지금의 비석을 세웠다. 원래 이증의 재사*인 수다재와 함께 월곡면 미질동에 있었으나,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1974년 예안면 기사리로 옮겼다가 2000년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이증의 아버지 이원(李原, 1368~1429)은 조선 초 태종이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세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이러한 아버지의 공훈으로 이증은 단종 1년(1453) 진사시에 합격한 후 음서*로 진해·영산현감을 지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고향인 안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이증의 신도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문은 조선시대의 문신 한치응(韓致應, 1760~1824)이 지었고 이가순(李家淳, 1768~1844)이 글씨를 썼다.

  • 재사(齋舍): 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묘소나 사당 옆에 짓는 집.
  • 음서(蔭敍):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공을 세웠거나 높은 벼슬을 한 양반의 자손을 과거시험 없이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