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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소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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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소류정
Soryujeong Pavilion, Cheongsong
청송 소류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청송 소류정
영문명칭 Soryujeong Pavilion, Cheongsong
한자 靑松 小流亭
주소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길안청송로 1472-40(덕천리 121)
지정(등록) 종목 국가등록문화재 제497호
지정(등록)일 2012년 8월 9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생활유적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소류정(현황측량면적 43.3㎡), 일각문(현황측량면적 3.2㎡), 담장(현황측량면적 29.9㎡)
웹사이트 청송 소류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소류정은 구한말 때 청송에서 의병대장을 지낸 소류 심성지(沈誠之)가 경전을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고종 22년(1885)에 처음 세웠다. 이후 붕괴 직전에 있던 것을 1997년도에 중건하였다.

심성지는 학식이 높아 역학변화지리(易學變化之理)와 성학심성지설(聖學心性之設)을 연구하는 등 유학을 통달한 선비로 그 시대에 이름을 떨쳤다. 고종 25년(1888)에 의금부도사, 고종 31년(1894)에 돈녕부* 도정**이라는 벼슬을 받았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이후 고종 33년(1896)에는 향천(鄕薦)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안덕 감은리 전투에서 빛나는 전공(戰功)을 세웠다.

경내에는 2003년에 심성지의 공덕을 기려 국가보훈지원사업으로 세운 사적비(事績碑)가 있고, 아들 능찬(能璨), 증손자 상기(相基) 등 3대의 공로가 새겨진 비도 함께 세워져 있다.


  • 돈녕부(敦寧府): 초기에는 외척의 정치참여를 허용하다 폐지한 뒤 1414년 태조의 계통도 아니고 봉군도 할 수 없는 자와 정계 진출이 막힌 외척을 위해 실제의 직사(職事)가 없는 돈녕부를 마련했다.
  • 도정(都正); 조선시대 종친부·돈녕부·훈련원의 정3품 당상관직.

영문

Soryujeong Pavilion, Cheongsong

This pavilion was first built in 1885 by Sim Seong-ji (1831-1904), a leader of a local civilian army.

Sim Seong-ji was a renowned Confucian scholar, who dedicated himself to studying instead of pursuing an official career. Due to the impending threat of Japanese imperialism, a civilian army was raised in the Cheongsong area in 1896, and Sim was inducted as the army leader. The army was initially victorious at some battles but was disbanded after four months following a decisive defeat. After that, Sim lived in seclusion in this area, studying and teaching his students at this pavilion.

The current building was rebuilt in 1997. In front of the pavilion, there are three commemorative steles bestowed to Sim, his son, and his great-great-grandson by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recognition of their loyal devotion to the country.

영문 해설 내용

소류정은 이 지역의 의병장이었던 심성지가 1885년에 지은 것이다.

심성지는 이름난 유학자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힘썼다. 일본 제국주의의 위협이 다가오자, 1896년 청송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심성지가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청송의 의병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4개월만에 대패하여 해산되었다. 이후 심성지는 이곳에서 공부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은거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7년에 지은 것이다. 정자 앞에는 3개의 비석이 있는데, 심성지와 그의 아들, 고손자의 공훈을 기려 나라에서 수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