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린 고신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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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린 고신왕지
Royal Edict of Appointment Issued to Seong Seok-rin
성석린고신왕지.jpg
대표명칭 성석린 고신왕지
영문명칭 Royal Edict of Appointment Issued to Seong Seok-rin
한자 成石璘 告身王旨
주소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대량리
지정(등록) 종목 보물 제746호
지정(등록)일 1983.05.07
분류 기록유산/문서류/국왕문서/교령류
소유자 성배현
관리자 성배현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매



해설문

국문

2016

왕지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정치가인 성석린(1338~1423)에게 태종이 내려준 문서이다.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왕위를 차지한 태종에게 불만을 품고 태조 이성계가 함흥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자, 성석린이 옛 친구로서 태조를 설득해 서울로 모셔와 태종과 화해하도록 주선하였다.

그 공을 높이 여겨 태종 2년(1402) 성석린을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으로 봉하고, 태종이 친히 그 내용을 적어 임명장을 하사하였다.

성석린은 세조사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성삼문(成三問)의 종조부이다.

성삼문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고 단종 복위 운동을 주도하다 발각되어 목숨을 잃었고, 그의 집안은 화를 당하였다.

그 후손들이 이곳 진안으로 피난하면서 이 왕지를 가져와 소중히 간직해 왔다고 한다.

2020

성석린 고신 왕지는 조선의 제3대 왕 태종(1367~1422)이 성석린에게 내린 임명장이다. '고신(告身)'은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을 말하며 '왕지(王旨)'는 임금이 신하를 임명하거나 해임할 때 내리는 문서로, 흔히 교지(敎旨)라고도 한다.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자, 화가 난 아버지 태조 이성계는 함흥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이성계의 옛 친구였던 성석린이 태조를 설득하여 두 부자를 화해시켰다. 태종은 이러한 성석린의 공로를 치하하여, 성석린을 좌명공신(佐明功臣)*으로 봉하고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왕지를 친히 써서 내렸다.

이 왕지가 작성된 날은 '홍무(洪武)* 35년 11월 18일'로 되어 있는데, 홍무 35년은 태종 2년(1402)이다. 필체는 흘려 쓴 초서체(草書體)이고, 종이 크기는 가로 61.1㎝ 세로 32㎝이다.

1883년에 창녕 성씨 문중에서 어서각(御書閣)*을 지어 고신 왕지를 보관하고 있다.


  • 좌명공신(佐明功臣) : 정종 2년(1400)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
  • 홍무(洪武) :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연호.
  • 어서각(御書閣) : 임금이 손수 쓴 글씨를 보관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전라북도에는 진안과 장수에 하나씩 남아 있다.

영문

  • Royal Edict of Appointment Issued to Seong Seok-rin

2016

This royal edict was conferred by King Taejong (r. 1400-1418) to Seong Seok-rin (1338-1423), a civil official of the early Joseon period.

Before ascending to the throne, King Taejong was involved in the murder of his own brothers for the crown. His father, King Taejo, the founder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was so distressed by the incident that he retired to his hometown in Hamheung with the intention of never coming back. In order to restore his relationship with his father, King Taejong sent Seong Seok-rin, who was an old friend of King Taejo, to Hamheung. Seong successfully persuaded the former king and brought him back to the capital. In recognition of his efforts and achievement, King Taejong bestowed Seong with honorable titles, and appointed him as a meritorious subject by conferring this royal edict.

Seong was also a granduncle of Seong Sam-mun, one of the Six Martyred Ministers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r. 1455-1468). As a result of opposing King Sejo, Seong Sam-mun was put to death by the king. This led to great misfortune for his family, with his descendants taking refuge in the Jinan area. During their refuge, they sought to preserve this royal edict and brought it with them.

2020

Royal Edict of Appointment Issued to Seong Seok-rin

This royal edict was issued in 1402 by King Taejong (r. 1400-1418) to Seong Seok-rin (1338-1423) for his appointment as chief state councilor, the highest government position in the government. The paper measures 61.1 cm by 32 cm in length.

Seong Seok-rin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357 during the Goryeo period (918-1392) and served various government posts. He helped in the establishment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for which he received the title of meritorious subject.

While still a prince, King Taejong led a rebellion to ensure his succession to the throne. His father, King Taejo (r. 1392-1398), was disheartened by the fighting and abdicated the throne, retiring to his hometown of Hamheung. However, Seong Seok-rin, who was an old friend of King Taejo, was able to repair the damaged relationship between father and son. In recognition of this, King Taejong bestowed upon Seong the title of meritorious subject and issued this personally calligraphed edict which appointed him as chief state councilor.

In 1883, the descendants of Seong Seok-rin of the Changnyeong Seong Clan family built a Royal Calligraphy Pavilion to house this document.

영문 해설 내용

2020

조선 태종(재위 1400-1418)이 1402년 성석린(1338-1423)을 조정 최고위 관직인 영의정부사로 임명하면서 내린 임명장이다. 종이 크기는 가로 61.1㎝ 세로 32㎝이다.

성석린은 고려시대인 1357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고, 이후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인 태조(재위 1392-1398)는 함흥에 머무르며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태조의 옛친구였던 성석린이 태조를 설득하여 부자를 화해시켰다. 태종은 성석린의 공을 인정해 1402년에 그를 공신에 봉하고, 당시 최고의 관직이었던 영의정부사로 임명한다는 내용을 친필로 적어 하사하였다.

성석린의 후손인 창녕성씨 문중에서는 1883년 어서각을 지어 이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