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진영 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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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진영 서실
Seol Jin-yeong’s Study Hall
설진영 서실, 두피디아.
대표명칭 설진영 서실
영문명칭 Seol Jin-yeong’s Study Hall
한자 薛鎭永 書室
주소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 25
지정(등록) 종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96호
지정(등록)일 1998년 1월 9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일제강점기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설진영 서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남파 설진영(1869~1940)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던 곳이다.

설진영은 1895년부터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체결되자 민족사상을 갖춘 제자를 기르기 위해 서실을 열고 학문 연구와 애국지사 배출에 온 힘을 바쳤다.

그 후 1940년 일본이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는 창씨개명령을 내리자, 조상 대대로 내려온 성(姓)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서실 앞 우물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영문

Seol Jin-yeong’s Study Hall

This study hall was built in 1910 by the scholar Seol Jin-yeong (1869-1940) to pursue his studies and teach students.

In 1895, following the assassination of the Korean queen consort by the Japanese, Seol Jin-yeong joined his teacher Gi U-man (1846-1916) in the anti-Japanese armed resistance and led a civilian army. After Japan’s forced annexation of Korea in 1910, Seol established this study hall, where he devoted himself to his scholarly work and to raising future patriots. In 1940,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issued a directive for all Koreans to change their names to Japanese names in order to erase their national identity. In response, Seol took his own life by jumping into the well in front of the study hall, saying that he cannot change his family name, which had been passed down for generations.

The study hall consists of an underfloor-heated room to the left and a wooden-floored hall to the right. The doors between the room and the hall can be lifted to join the spaces as needed.

영문 해설 내용

이 서실은 학자 설진영(1869-1940)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910년에 세웠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설진영은 스승 기우만(1846-1916)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체결되자 서실을 열고 학문 연구와 애국지사 배출에 온 힘을 바쳤다. 1940년 일본이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한국인들의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조상 대대로 내려온 성씨는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서실 앞 우물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서실은 왼쪽의 온돌방과 오른쪽의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과 대청 사이의 문은 들어 올려 필요시 공간을 넓게 쓸 수 있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