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전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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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전도비
Samjeondobi Monument, Seoul
삼전도비.jpg
대표명칭 서울 삼전도비
영문명칭 Samjeondobi Monument, Seoul
한자 서울 三田渡碑
주소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
지정(등록) 종목 사적 제101호
지정(등록)일 1963년 1월 21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역사사건/역사사건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200㎡
웹사이트 서울 삼전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인조 14년(1636) 봄, 조선은 형제 관계를 군신 관계로 바꾸자는 후금의 요구를 물리쳤다.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꾼 청 태종은 그해 겨울 병자호란을 일으켰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거하다가 당시 한강나루터였던 삼전도로 나와 청 태종의 신하가 되는 의례를 거행했다.

인조 17년(1639)에 세운 삼전도비의 원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며 치욕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로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용 모양으로 장식했다. 몸돌 앞면에 청에 항복했던 상황과 청 태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만주문자(왼쪽)와 몽골문자(오른쪽)로 새겼고, 뒷면에는 한자로 새겨 놓았다. 비석 옆에는 작은 크기의 받침돌이 하나 남아있는데 이는 더 큰 비석을 세우라는 청의 요구 때문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삼전도비는 고종 32년(1895)에 청일전쟁이 끝난 뒤 땅속에 묻혔으나 1917년에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다시 세웠고 1956년에 문교부 주도로 또다시 땅속에 묻히는 등 수난을 겪었다. 이후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자리를 옮겨 다시 세웠고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문화재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원래 위치(현재 석촌호수 서호 내부)에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 2010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을 설치했다.

영문

Samjeondobi Monument, Seoul

This monument was erected at the request of Qing China in 1639, shortly after the Manchu invasion of 1637.

On January 3, 1637, the Qing troops crossed the Amnokgang River. Six days later, King Injo (r. 1623-1649) and his ministers took refuge in Namhansanseong Fortress to defend themselves against the invaders. After withstanding 47 days of siege, King Injo went to surrender at the ferry dock of Samjeondo, where the Qing troops were staying, and was forced to accept vassal status to Qing. Later, the Qing Emperor Hong Taiji ordered a monument to be erected at Samjeondo, praising his excellent virtues.

The original name of this monument is “Stele Honoring the Merits and Virtues of the Emperor of Great Qing.” Its inscription includes the reason why Qing came to Joseon, the results of the war, and words of praise devoted to the Qing Emperor. The inscription on the front side is written in Manchu and Mongolian characters, and the back side is in Chinese characters.

This monument has been a target of vandalism for a long time, as it was regarded as a symbol of a humiliating history. It was once buried in 1895 and was re-erected in 1917. In 1956, it was buried again and was found after a flood in 1963. In the same year, the monument was designated as a historic site and was re-erected again. The structure housing this monument was built in 2010.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병자호란 직후인 1639년 청의 요구로 세운 것이다.

1636년 청이 조선을 침략하자, 인조(재위 1623-1649)와 조정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거하였다. 40여 일을 버텼으나, 결국 인조는 청나라 군대가 머물고 있던 한강 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청 태종에게 절을 하고 군신관계를 맺는 치욕적인 항복 의례를 거행했다. 이후 청은 청 태종의 공덕을 알리는 기념비를 삼전도에 세울 것을 요구했다.

이 비의 원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이다. 비문에는 청이 조선에 출병한 이유, 전쟁의 결과, 청 태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비의 앞면은 만주문자와 몽골문자로 새겼고, 뒷면은 한자로 새겼다.

삼전도비는 치욕적인 역사의 상징으로 여겨져, 여러 차례 수난을 당하였다. 1895년 땅속에 묻혔다가 1917년 세워졌고, 1956년 다시 묻혔다가 1963년 홍수로 발견되어 사적으로 지정되며 다시 세워졌다. 보호각은 2010년에 설치되었다.

병자호란 타임라인

음력 날짜 양력 날짜 관련 기사 관련 기사
1636.12.02 청의 선발대가 심양을 출발.
1636.12.08 1637.01.03 병자호란 발발. (압록강 도하, 조선의 국경 침범.)
1636.12.13 1637.01.08 침입이 조정에 알려짐. 도원수 김자점이 적병이 안주에 이르렀다고 치계하자 이에 대해 논의하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3일 계미 1번째기사.
1636.12.14 1637.01.09 파천을 논의, 인조가 남한산성에 도착함. 최명길에게 강화를 청하게 하고 상은 남한 산성에 도착, 강도로 가기로 결정하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4일 갑신 3번째기사.
1637.01.22 1637.02.16 강화도가 함락됨. 강도가 함락되는 전후 사정,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2일 임술 8번째기사.
1637.01.30 1637.02.24 삼전도에서 항복함.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서울 창경궁으로 나아가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2번째기사.
1637.11.25 1638.01.09 삼전도비의 비문을 지음 장유 등에게 명하여 삼전도비의 글을 짓게 하고 이경석의 글을 택하다,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11월 25일 기축 1번째기사.
1639.12.05 1639.12.28 삼전도비를 세움 삼전도 비의 일을 끝내다, 인조실록 39권, 인조 17년 12월 5일 정해 1번째기사.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