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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득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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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득우 묘
Tomb of Jeon Deuk-u
대표명칭 전득우 묘
영문명칭 Tomb of Jeon Deuk-u
한자 田得雨 墓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봉정리 산 12-1
지정(등록) 종목 시도기념물 제25호
지정(등록)일 1980년 10월 23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수량/면적 1기/5,326㎡
웹사이트 전득우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전득우묘는 조선 초 부윤(府尹)을 지낸 전득우 장군의 묘로, 아버지 전주, 아들 전흥의 묘와 함께 있다.

전득우는 고려 말에 태어났다. 아버지인 전주는 고려 말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가 공주에 유배되어 노비가 되었다. 아들 전흥의 벼슬이 의금부제조가 되면서, 그 아버지인 전득우에게도 한성부윤의 벼슬이 내려졌다. 그로 인해 왕이 직접 묘비도 내려주고, 장례도 나라에서 주관하게 되었다.

전득우묘는 네모난 봉분 주위에 호석*이 둘러졌고, 그 아래에는 판돌을 세워 만든 무덤이 있다. 앞쪽에 서 있는 묘비에는 원래 부인의 묘였는데 전득우가 늦게 죽어 함께 묻혔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묘는 봉분이나 묘역이 조선 초 무덤의 모습을 잘 보여주며, 나라에서 예를 갖춰 치른 공신의 장례로 드문 사례여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 호석(護石): 큰 무덤의 봉토가 무너지지 않도록 아랫부분을 둘러막은 돌

영문

영문 해설 내용

고려말 조선초의 인물인 전득우와 그의 부인의 합장묘이다.

전득우의 아버지인 전주는 고려 말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가 노비가 되어 공주에 유배되었다. 후에 전득우의 아들 전흥(1376-1457)이 이방원(후에 태종(재위 1400-1418))의 사병으로서 큰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아들의 공으로, 세종(재위 1418-1450) 때 전득우의 신분도 회복되었으며, 왕이 직접 묘비를 내려주고 장례도 나라에서 주관하였다.

전득우의 묘는 원래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 있었고, 1565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전득우의 묘 위쪽에는 아버지 전주의 묘가 있고 아래쪽에는 아들 전흥의 묘가 있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