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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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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봉수대
"태평봉수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태평봉수대
한자 太平烽燧臺
주소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 31-2번지
지정(등록) 종목 시도기념물 제36호
지정(등록)일 1977년 12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교통통신/통신/봉수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일원
웹사이트 "태평봉수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봉수란 낮에는 연기와 밤에는 횃불로써 변방의 급박한 소식을 중앙에 알리던 통신제도이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근대적인 통신제도가 도입되기 이전까지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전보 기능을 하였다.

진안에는 금남정맥 작은 싸리재 동쪽 성재봉 정상부에 태평봉수가 위치한다. 연대는 그 평면 형태가 직사각형으로 서로 크기가 다른 깬돌을 가지고 수직으로 쌓았으며, 남쪽에 연대의 정상부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지표조사 때 물결무늬가 새겨진 가야토기편이 수습되어 삼국시대 전북 동부 지역에 기반을 둔 가야 세력이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태평봉수대의 현재 모습은 1990년대 진안군에서 정비 및 복원한 것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봉수는 횃불과 연기로 적의 침입과 같은 군사정보를 알리던 통신 수단이다. 신호가 잘 보이도록 산봉우리에 설치했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다섯 개의 연조에 불을 피워서 상황을 알리는 신호를 전달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을 중심으로, 직봉 사이에는 간봉을 두기도 했다. 이러한 제도는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진안의 성재봉(해발 830m) 정상에는 원래 삼국시대에 이 지역에 기반을 둔 가야 세력이 만든 봉수대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1595년 임진왜란 때 원래의 봉수가 있던 자리에 태평봉수대를 다시 쌓았으며, 동남쪽의 장안산에서 신호를 받아 북서쪽의 탄현성으로 연결하였다.

서로 크기가 다른 깬돌을 수직으로 쌓아 직사각형의 봉수대를 만들었으며 남쪽에 정상부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현재의 봉수대는 1990년대에 보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