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진남관
여수 진남관 Jinnamgwan Hall, Yeos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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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여수 진남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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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Jinnamgwan Hall, Yeosu |
한자 | 麗水 鎭南館 |
주소 | 전라남도 여수시 동문로 11 (군자동) |
지정(등록) 종목 | 국보 |
지정(등록)일 | 2001년 4월 17일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궁궐·관아/관아 |
시대 | 조선 선조32년(1599)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여수 진남관,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
해설문
국문
진남관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지방 관청 중 대표적인 건물로,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1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선조 32년(1599)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진해루 터에 지은 75칸의 객사*이다. 현종 5년(1664)에 이도빈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부분 수리하였고, 이제면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화재로 사라졌던 것을 숙종 44년(1718)에 다시 세웠다. 헌종 11년(1845)에 김일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서쪽과 동쪽 부분 7칸을 수리했으며, 1898부터 1899년까지 여수 군수 오횡묵이 75칸 전체를 보수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보수와 복원 공사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진남관은 정면 1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긴네모꼴 대지에 2열 바른 층 쌓기를 하고 기단 가장자리를 장대석으로 돌렸으며, 큰 덤벙 주춧돌* 위에 민흘림* 원형 기둥 70개를 세웠다. 기둥은 창방*으로 연결되고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했으며, 기둥 위에 주두*를 놓고 포 사이에는 화반*을 받쳤다.
- 객사(客舍): 조선시대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공식행사를 하던 곳. 고려·조선 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여 외국사신이나 다른 곳에서 온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하던 숙소.
- 덤벙 주춧돌: 자연 그대로의 돌을 다듬지 않고 건물의 기둥 밑에 놓은 주춧돌.
- 민흘림: 기둥의 굵기를 밑동에서 꼭대기로 갈수록 조금씩 가늘게 하는 것.
- 창방(昌枋): 기둥 위에 건너질러 놓아 기둥머리를 좌우로 연결하는 부재.
- 공포(栱包):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
- 주두(柱頭): 기둥 위를 장식하며 공포를 받치는 넓적하고 네모진 나무.
- 화반(花盤): 포를 받치기 위해 끼우는 나무 조각.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진남관은 전라좌수영의 객사로 1599년에 처음 지어졌다.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고을 관아에 설치했던 중요한 건물이다.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왕에게 예를 갖추는 의례를 올리던 곳이며, 공무로 출장 온 관원이나 고을을 찾은 중요한 손님들이 숙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진남관은 조선 수군의 중심기지로서의 역사성과 현존하는 지방 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 받아 2001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원래 이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공무를 보고 군대를 지휘한 진해루라는 누각이 있었다고 한다. 진해루는 전쟁 중에 불에 타버렸고, 1599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그 터에 지은 진남관을 지었다. 진남관이라는 이름은 “남쪽의 왜적을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후 1664년에 부분적으로 수리하였다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18년에 다시 세웠다. 1845년에 부분 수리하고, 1898년부터 1899년까지 전체 보수하였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보수와 복원 공사를 하였다.
진남관은 정면 1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긴네모꼴 대지에 2열 바른 층 쌓기를 하고 기단 가장자리를 장대석으로 돌렸다. 자연 그대로의 다듬지 않은 커다란 돌을 주춧졸로 하여 그 위에 민흘림 원형 기둥 70개를 세웠다. 기둥 위에는 지붕의 무게를 떠받치는 공포를 배치했으며, 넓적하고 네모진 주두와 화반으로 장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