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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림산 봉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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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7월 31일 (수) 01:4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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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림산봉수지
"천림산 봉수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천림산봉수지
한자 天臨山烽燧址
주소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산35번지
지정번호 시도기념물 제179호
지정일 2002년 9월 16일
분류 유적건조물/교통통신/통신/봉수
수량/면적 일원(9,287㎡)
웹사이트 "천림산 봉수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봉수는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를 올려 국경 지역의 긴급한 군사정보를 중앙에 알리던 옛 통신 수단이다. 조선 시대 봉수 노선은 함경도 경흥, 경상도 동래, 평안도 강계, 평안도 의주, 전라도 순천 등 5개로 세종 대에 정비되어 고종 31년(1894)까지 유지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봉수는 평상시 매일 이른 시간에 국경 지역에서 시작하여 봉수 노선을 따라 당일 초저녁이면 서울 목멱산현재의 남산에 도달했다고 한다. 봉수는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이 중 평화로울 때 올리는 1개의 봉수를 평안화(平安火) 혹은 태평화(太平火)라고도 불렀다.

천림산봉수는 동래 다대포진에서 시작한 봉수 신호를 용인 석성산 봉수로부터 전달받아 최종 목적지인 서울의 목멱산 봉수에 전달하였다. 이 봉수에는 봉수군 25명이 배정되었으며 5명이 조를 이루어 6일씩 돌아가면서 근무하였다. 시기에 따라 월천현(月川峴) 봉화, 천천산(穿川山) 봉수, 천천현(穿川峴) 봉수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 후기부터 천림산봉수로 불렸다.

2000년 지역 주민의 제보에 따라 청계산 자락인 현재의 위치에서 봉수터를 발견하게 되었다. 발굴 조사를 통해 연조(煙竈), 연기나 횃불을 올리기 위해 불을 피우는 시설, 방호벽, 담장 등과 봉수군들이 사용하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발굴된 봉수터는 학술 연구를 통해 문헌기록상 성남 지역에 있었다고 알려진 천림산봉수로 추정되어 명칭을 정하였다. 조사 결과 5개 연조의 하부 구조가 확인되고 보존 상태가 좋아 2002년 9월 경기도 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었다. 2019년 4개의 연조와 방호벽, 담장 등이 복원되었으며 1연조 구역은 발굴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 천림산 봉수지 제1 연조

연조(煙竈)는 연기나 횃불을 피우는 아궁이다. 천림산 봉수지 제1 연조 유구(遺構)는 외방내원형(外方內圓形)으로 바깥쪽은 네모 모양, 안쪽은 원 모양으로 돌을 쌓았다. 천림산봉수지 연조 중 하부의 규모가 가장 크고 온전하게 남아 있어 과거의 모습 그대로 보존하였다.

영문

Cheollimsan Beacon Station Site

Beacons were a type of a smoke-and-fire-signal communication system to warn of military events such as enemy invasions. The beacons, which are located atop mountains for visibility, would have five furnaces which were lit according to a code and send out signals in a particular pattern to indicate the severity of the situation.

In the Joseon period (1392-1910), the information was relayed to the central government through a network of beacon stations across the nation. The beacon tower network was comprised of five main lines and other local auxiliary lines. This system was operational until 1894 when the modern communication system was introduced.

This site was found in 2000, and according to records, it was once occupied by Cheollimsan Beacon Station. The beacon station received signals, started from today’s Busan area, from Seokseongsan Beacon Station in Yongin and delivered it to the final destination, Mongmyeoksan Beacon Station (todays Namsan Mountain, Seoul). There were twenty-five assigned beacon soldiers and five of them worked in groups for six days.

Through a series of excavation surveys conducted in the 2000s, five furnace sites, protective walls, fences, and building sites were found on this site. The furnace no. 1 has remained its original structure, and the rest four furnaces were rebuilt in 2019.

  • Furnace No. 1

This furnace is the largest among the five furnaces of this beacon station. Its original structure has been preserved nearly intact, which consists of square outer and round inner stone formations.

영문 해설 내용

봉수는 횃불과 연기로 적의 침입과 같은 군사정보를 알리던 통신 수단이다. 신호가 잘 보이도록 산봉우리에 설치했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다섯 개의 연조에 불을 피워서 상황을 알리는 신호를 전달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근본 노선을 중심으로, 근본 노선 사이에는 보조 노선을 두기도 했다. 이러한 제도는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 봉수지는 2000년에 발견되었으며, 기록에 따르면 천림산 봉수가 있던 곳이다. 이 봉수는 지금의 부산 지역에서 시작된 신호를 용인 석성산봉수로부터 전달받아, 최종 목적지인 서울의 목멱산봉수(지금의 남산)에 전달하였다. 봉수군 25명이 배정되었으며 5명이 조를 이루어 6일씩 근무하였다.

2000년대에 이루어진 발굴조사 결과, 5개의 연조, 방호벽, 담장,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제1연조는 원래의 형태가 온전하게 남아있었고, 나머지 4개의 연조는 2019년에 복원하였다.

  • 제1연조

제1연조는 이 봉수의 다섯 연조 중 규모가 가장 크다. 바깥쪽은 네모 모양, 안쪽은 원 모양으로 돌을 쌓았으며, 원래의 모습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