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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양 이씨 종중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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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10월 29일 (토) 15:5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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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양 이씨 종중 정려
철목리 옥산장씨 열녀각, 디지털무주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흥양 이씨 종중 정려
한자 興陽 李氏 宗中 旌閭
지정번호 무주군 향토문화유산



해설문

국문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그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는 것이다. 흥양 이씨 종중 정려는 이만번ㆍ이만경 형제의 정려인 충효각과 옥산 장씨 정려인 효열각으로, 과거 정문거리(정문걸)라 불린 나지막한 구릉에 나란히 위치해 있다.

이만번과 이만경 형제는 경남 함양군 안의면의 갑부 정희량이 1728년 이인좌의 난에 동조하여 병사를 일으키자 의병을 모아 관병에 합세하여 성초령에서 공을 세웠다. 이들은 효성도 지극하여 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이들의 충성과 효성이 알려지면서 1888년 충효각이 건립되었다.

특히 이만경은 병든 아버지가 꿩과 물고기를 좋아하여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엄동설한에 구할 방도가 없어 걱정하는데, 집에서 기르던 개가 길을 안내하여 가 보니 눈 속에 꿩이 떨어져 있었고, 도끼로 계곡의 얼음을 깨니 잉어가 뛰어나왔다고 한다.

이만경의 제자들과 후손들이 두길리 구산마을 계곡에 설치자투소(雪雉自投所: 눈밭에 꿩이 떨어진 곳), 나제통문 아래 계곡의 바위에 빙어약소(氷魚躍所: 얼음을 깨고 물고기가 나온 곳)라고 새긴 각자가 전한다.

효열각은 병세가 깊은 남편을 지성으로 봉양하다가, 남편이 운명하자 남편의 허리띠로 목을 매어 남편의 뒤를 따른 옥산 장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1892년 건립되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2기의 정려각은 흥양이씨 문중 인물들을 기리는 정려를 모신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왼쪽 정려각에는 이만번(1680-), 이만경(1691-1776) 형제의 충절과 효행을 기리는 정려 2개가 있고, 오른쪽 정려각에는 이철구의 아내 옥산장씨의 열행을 기리는 정려가 있다.

이만번과 이만경은 1728년 경남 지역에 반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관병에 합세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만경은 지극한 효성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이만경은 병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꿩고기와 생선을 항상 집에 준비해두고 있었는데, 추운 겨울이 되자 구할 방도가 없어 걱정하였다. 그런데 집에서 기르던 개가 길을 안내하여 가보니 눈 속에 꿩이 떨어져 있었고, 도끼로 계곡의 얼음을 깨니 잉어가 뛰어나왔다고 한다. 이만번의 충절과 이만경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1888년 정려가 내려졌고 같은 해 정려각이 건립되었다.

옥산장씨는 병세가 깊은 남편을 지성으로 봉양하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남편의 허리띠로 목을 매어 세상을 떠났다. 그때 옥산장씨의 나이는 22세로 남편과 동갑이었다. 장씨의 열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고 1892년에 정려각이 건립되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