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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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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입석
인동입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인동입석
한자 仁同立石
주소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 627-4번지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84호
지정(등록)일 1987년 5월 13일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민간신앙/마을신앙
수량/면적 2기(116㎡)
웹사이트 인동입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 선돌(입석)은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이다. '괘혜암(掛鞋岩)'이라 새겨진 글자 때문에 일명 '신 걸이 바위'라고도 한다. 조선 선조 17년(1587)에 인동 현감으로 부임한 이등림(李鄧林)이 선정을 베풀고 임기가 끝나 돌아갈 때, 한 계집종이 아전에게서 짚신 한 켤레를 받은 사실을 알고, 그것을 이 돌에 걸어두고 떠났는데, 이등림의 이러한 청렴함이 다른 공직자들에게 귀감이 되었다고 한다. 괘혜암 옆에는 '출포암(出捕岩)'이라 불리는 선돌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대정기념비(大正記念碑)'라 새긴 것을 광복 이후에 지우고 '대한민국건국기념비(大韓民國建國記念碑)'라 다시 새겼다. 이 선돌은 인동에 관아가 설치될 무렵 고을을 이롭게 하고 고을을 넘겨다보는 도둑을 막을 수 있다는 풍수지리적 근거에 따라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 선돌들은 선사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을 짐작하게 할 뿐 아니라 조선시대 청백리의 미담이 담긴 기록물로 의미가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입석은 선사시대의 돌기둥 유적으로 선돌이라고도 한다. 인동입석은 총 2기로 구미 지역의 옛 이름인 인동을 따서 이름이 지어졌다.

오른쪽의 큰 입석은 앞면에 ‘괘혜암(掛鞋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신발을 걸어두었던 바위’라는 뜻이다. 1584년 인동현감으로 부임한 이등림(1535-1594)이 선정을 베풀고 임기가 끝나 돌아갈 때, 한 계집종이 아전에게서 짚신 한 켤레를 받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등림은 그 신발을 이 돌에 걸어두고 떠났는데, 이러한 청렴함이 다른 공직자들에게 귀감이 되었다고 한다.

왼쪽의 입석은 마을을 이롭게 하고 도둑을 막을 수 있다는 풍수지리적 믿음에 따라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일본의 다이쇼 연호를 기념하는 문구를 새겼었는데, 1945년 광복 이후 그 문구를 지우고 ‘대한민국건국기념비(大韓民國建國記念碑)’라 다시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