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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백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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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백세각
성주 백세각, 성주역사80선, 성주문화관광.
대표명칭 성주 백세각
한자 星州 百世閣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1길 21-3 (고산리 542-1)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3호
지정(등록)일 1982년 8월 4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성주 백세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비가 오는 날 자정에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기 때문에 종손이 아니면 무서워서 잠을 못잔다”는 전설이 전하는 이 가옥은 조선전기 사헌부 집의*

등을 지냈던 송희규(宋希奎, 1494∼1558)가 지은 것으로 조선 명종 6년(1551)에 짓기 시작하여 다음해 완공한 건물이다. 

건물은 백세각과 사당, 관리사 및 화장실로 구성되어 있다. 백세각의 평면은 ‘ㅁ’자 모양이며,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엮은 점과 대패를 쓰지 않고 손도끼(자귀)로만 다듬어 만들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백세각은 독립운동과 관련이 깊은 건물로, 경북 유림단 파리장서 사건**의 모의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유학자인 공산 송준필은 백세각에서 유림의 궐기를 독려하는 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을 작성·배포하고, 제자들과 함께 1919년 4월 2일 성주 장날 만세시위에 배포할 태극기를 제작·보관했다고 한다. 또한 백세각은 국가보훈처 현충시설이다.


  • 사헌부 집의: 조선시대 사헌부는 언론 활동, 풍속 교정, 관리에 대한 규찰과 탄핵 등 감찰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집의는 사헌부 소속의 종3품 관직 명칭이다.
  • 경북 유림단 파리장서 사건 : 1919년 송준필, 김창숙 등이 중심이 되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탄원서를 보냈던 사건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백세각은 조선시대의 문신 송희규(1494-1558)가 1552년에 지었다. 이 집은 본채, 사당, 관리사, 화장실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구성된 폐쇄형 구조이다.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엮은 점과 대패를 쓰지 않고 손도끼로만 목재를 다듬어 집을 지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집에는 “비가 오는 날 자정에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기 때문에 종손이 아니면 무서워서 잠을 못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백세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도 관련이 깊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난 후 유림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제출하기로 하였다. 이에 전국의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한 서한이 파리로 보내졌는데, 당시 백세각은 성주 지역 유림들이 모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학자 송준필(1869-1943)은 백세각에서 유림의 궐기를 독려하는 문서를 작성해 배포하고, 제자들과 함께 1919년 4월 2일 성주 장날 만세시위에 배포할 태극기를 제작해 보관했다고 한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