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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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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 선생 묘
대표명칭 홍영식 선생 묘
한자 洪英植 先生 墓
주소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문장리 산 82
지정번호 향토유적 제7호



해설문

국문

이 묘는 홍영식(자는 중육, 호는 금석, 본관은 남양, 시호는 충민, 1855~1884)의 묘이다. 홍영식은 조선 말의 문신으로,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이다.

고종 10년(1873)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정자(正字)·대교(待敎) 등의 벼슬을 지냈고, 고종 18년(1881)에는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을 사찰하고 돌아와 통리기무아문의 군무사부 경리사, 부제학, 참의통리내무아문사무, 참의군국사무, 참의교섭통상사무를 역임했다. 고종 20년(1883)에는 협판교섭통상사무를 지내고 전권부대신으로 미국에 다녀온 뒤 이듬해 병조참판이 되었으며, 그해 우정국총판으로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당 동지들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신정부를 조직하고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3일 만에 실패하자 국왕을 호위하다가 진압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고종 31년(1894)에 갑오개혁으로 신원되고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홍영식의 묘는 원래 광주시 초월면 쌍룡리에 있었는데, 1903년 이곳으로 이장했다. 봉분의 높이는 1.1m, 둘레는 6.15m로 약 99㎡의 규모이다. 묘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오른쪽에는 옥개**를 얹은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비에는‘금석선생 남양 홍공영식지묘’라고 쓰여 있는데, 이 비문은 1977년 당시 체신공무원훈련소장이었던 정규석이 쓴 것이다.

  • 추증되다: 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가 높아지다.
  • 옥개: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