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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백당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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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2월 21일 (월) 19:3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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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백당 종택
안동 묵계서원 및 보백당 종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보백당 종택
한자 寶白堂 宗宅
주소 경북 안동시 길안면 충효로 1736-5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9호
지정(등록)일 1980년 6월 17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3동1식
웹사이트 안동 묵계서원 및 보백당 종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서원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과 응계(凝溪) 옥고(玉沽)를 봉향하는 곳으로 조선 숙종(肅宗) 13년(1687)에 처음 건립되었다. 보백당은 성종(成宗) 때 대제학을 지냈고 응계는 세종(世宗) 때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되었는데, 1925년 강당과 읍청루․진덕문․동재 건물 등이 복원되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3칸에 마루를 두었고 좌우에 온돌방이 있다. 서원의 왼쪽에는 정면 6칸, 측면 5칸의 ‘口’자형 주사가 있다.

묵계종택은 정침(正寢)과 별당 및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口’자형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6칸의 규모가 비교적 큰 건물이다. 안채에는 용계당(龍溪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사당은 낮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2021.12.13. 명칭변경 (묵계서원 및 안동김씨 묵계종택 → 안동 묵계서원 및 보백당종택)

수정 국문

초고

보백당 종택은 청백리로 유명했던 문신 김계행(金係行, 1431~1517) 가문의 종택이다. 종택은 한 가문의 맏이가 대대로 살아온 집을 말한다.

김계행은 안동 김씨 가운데 안동 소산마을에 처음 들어온 김삼근(金三近, 1390~1465)의 둘째 아들이다. 성종 11년(1480) 과거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두 번의 사화를 겪은 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왔으며, 연산군 4년(1498)에 처가가 있는 이 마을에 정착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집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 가묘, 별채인 보백당 등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는 ㅁ자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별채인 ‘보백당(寶白堂)’과 가묘를 제외한 집의 건물들이 파괴되어 후대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보백당은 건물 좌측에 대청마루를 두고, 우측에 온돌방을 배치한 구조이며, 지금은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건물의 이름은 김계행이 청렴함을 강조하며 남긴 유훈이자 그의 호를 따서 붙인 것으로, ‘집안의 보물은 오직 청렴함 뿐’이라는 의미이다.

  • 사랑채에 걸려 있는 2개의 편액과 보백당 편액의 글씨는 모두 독립운동가로도 활약한 후손 김가진이 썼다.
  • 사랑채의 편액 중 ‘용계당’의 용계는 8대 종손 김중망의 호이다.

1차 수정

보백당 종택은 조선시대의 문신 보백당 김계행(寶白堂 金係行, 1431~1517) 가문의 종택이다. 종택은 한 가문의 맏이가 대대로 살아온 집을 말한다.

김계행은 안동김씨 가운데 안동 소산마을에 처음 정착한 김삼근(金三近, 1390~1465)의 둘째 아들이다. 성종 11년(1480)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사화를 겪은 후 안동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보백당이라는 호는 김계행이 쓴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지만, 보물로 여기는 것은 오직 청렴과 결백이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는 글에서 따왔다.

김계행은 소산과 묵계를 오가며 지냈는데, 후손 어느 대에서 종택이 고란리에 자리 잡게 되었다. 김계행을 기리는 묵계서원이 1687년 묵계리에 창건된 이후, 1880년대 들어 묵계서원 근처로 종택을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종택을 옮긴 이는 김계행의 15대손인 김학규(金學圭, 1852~1922)이다. 어느 날 묵계서원 원장이 고란리를 지나다 김학규가 살던 종택에 들렀는데, 집이 협소하고 위치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는 묵계리로 옮길 것을 권했다고 한다.

집은 대문채, 본채, 사랑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06년에 지은 사랑채가 이 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나머지 건물들은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가, 본채는 1957~1958년, 사당은 1994년에 다시 지어졌다.

참고자료

  • (안건번호 민속 2016-04-28) 28. 안동 보백당 종택 지정 검토, 『2016년도 문화재위원회 제4차 민속문화재분과 회의록』, 문화재위원회, 2016.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8329&bbsId=BBSMSTR_1019&mn=NS_03_03_04
  • 최은주, 『(경북의 종가문화) 보물은 오직 청백뿐, 안동 보백당 김계행 종가』, 예문서원, 2012, 96~102쪽. -> 종택은 대문간인 행랑채, 사랑채, 안채, 가묘, 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사랑채가 보인다. 사랑채 처마 밑에는 묵은재와 용계당이라는 편액 두 개가 나란히 걸려 있는데, 모두 동농 김가진(1846~1922)의 글씨이다. 용계는 8대 종손 김중망의 호이다. 사랑채 옆에 안채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있다. 정면에는 안방이, 오른쪽에는 부엌이 위치한다. 사랑채와 안채는 ㅁ자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안채에서 나와 오른편으로 돌아보면 별채인 보백당이 서 있다. 보백당은 좌측에 4칸 대청과 우측에 2칸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 아래에 ‘보백당’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 역시 김가진의 글씨이다. 종가에서는 보백당을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제청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15대종손 김학규가 묵계로 종택을 옮기면서 집안에 보백당을 건립했던 뜻과 부합한다. 가묘는 대문에서 본채를 바라보고 섰을 때 그 왼편 뒤쪽에 위치한다. 삼문을 가운데로 한 낮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내부에는 정면 뒤쪽 벽체에 공간을 만들고 문을 낸 벽감 형태의 신주 감실을 설치하였다. / 4대봉제사는 종손이 거주하는 대구에서 지내고 명절 차례는 가묘에서 지내며, 불천위 제사(김계행)는 보백당에서 지낸다.
  • [종가] 10. 안동 보백당 김계행 선생 종가, 경북일보, 2016.3.20.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54046 -> 보백당 김계행 선생은 조선 전기 대사간,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 등 3사의 요직과 성균관 대사성을 거치면서 당대 거유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함께 영남 유림을 이끌며 도덕과 학문으로 덕망을 받아온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으로 불리고 있다. 선생은 후세에 유림들에 의해 묵계서원에 제향됐다. /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은 "우리 집안에는 보물이 없으니, 보물은 오직 청백일 뿐이다."라는 뜻이다. 보백당이라는 당호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 보백당종택(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은 6·25전쟁 때 건물 대부분이 불타고 사당과 사랑채 '보백당'만 남았다. 현재의 다른 건물은 그 후에 다시 지었다. '보백당' 건물은 제청으로 사용된다. 불천위 교지는 1909년에 내려왔지만, 그 전부터 불천위 제사는 지냈다는 것이 차종손 김정기씨(1954년생)를 비롯한 후손들의 설명이다.
  •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안동(하) - 묵계종택과 서원, 영남일보, 2019.3.8.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90308.010360742120001 -> 보다 가까운 사랑채는 김계행의 호 ‘보백당(寶白堂)’이 현판으로 걸려 있다. ‘청백이 보물이다.’ 보백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4칸 대청과 2칸 온돌방으로 구성돼 있으며 대청과 방 사이에는 불발기창이 있는 장지문이 설치되어 있다. 대청에 걸쇠가 내려와 있는 것을 보니 분합문일 게다. 한여름 문을 열면 대청은 활짝 넓어진다. 지금은 제청으로 사용되고 다양한 소모임 장소로도 대여된다. 김계행의 첫 부인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후 1454년 묵계마을 남상치의 딸과 재혼했다. 원래 묵계마을은 의령남씨 세거지였다고 전해지는데, 아들이 없던 남상치가 사위인 김계행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외손봉사를 당부했다고 한다. 김계행이 묵계에 들어온 때는 1500년경이다. 김계행은 이곳에서 만휴정을 오가며 여생을 보냈고 그로부터 묵계마을은 안동김씨 세거지가 되었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6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ㅁ’자형의 집이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잠겨 있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댓돌에 신발은 있지만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다. 용계당 현판이 걸려 있는 정면 툇마루는 공연무대로 이용되고 안채의 방은 숙박이 가능하다.묵계종택은 6·25전쟁 때 사당과 사랑채만 남고 모두 불탔다고 한다. 현재의 다른 건물은 그 후에 다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