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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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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12월 11일 (토) 20:4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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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Historic Sites of Yanghwanaru Ferry Dock and Jamdubong Peak, Seoul
대표명칭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영문명칭 Historic Sites of Yanghwanaru Ferry Dock and Jamdubong Peak, Seoul
한자 서울 楊花나루와 蠶頭峰 遺蹟
주소 0
국가유산 종목 사적 제399호
지정(등록)일 1997년 11월 11일
분류 유적건조물/교통통신/교통/수상교통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35,548㎡
웹사이트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 일대는 조선 시대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던 양화나루터와 개화기 때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잠두봉 유적이 있는 곳이다. 강변도로와 지하 차도 건설, 인근 지역의 개발로 주변 환경이 훼손되자 1997년에 이 일대를 사적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양화나루는 서울에서 양천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주요 간선 도로에 있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은 조선 시대 전투용 배인 병선의 훈련장이었고, 흉년에는 관청이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에게 곡식을 나눠 주었던 진휼 장소이기도 했다. 양화는 버들꽃으로, 양화나루 인근 강변에 갯버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화나루는 주변 경관이 빼어나 뱃놀이 명소이기도 했다.

잠두봉은 양화나루 옆에 솟아 있는 20m 높이의 암벽으로, 1866년 병인양요[*] 때 방어 기지로 활용되었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하여 붙여진 이름인 절두산(切頭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병인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67년 10월에 성당과 박물관을 세웠다. 박물관은 절두산순교기념관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으며, 2008년에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사료와 순교자의 유품을 포함하여 약 5000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해마다 상설 전시와 기획 전시를 연다.


  • 병인양요(丙寅洋擾): 조선 고종 3년(1866) 흥선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

영문

Historic Sites of Yanghwanaru Ferry Dock and Jamdubong Peak, Seoul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 양화나루 터와 19세기 말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잠두봉 유적이 있는 곳이다. 강변도로와 지하 차도 건설, 인근 지역의 개발로 주변 환경이 훼손되자 1997년에 이 일대를 사적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양화나루는 서울에서 양천(지금의 서울 강서구 지역)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시대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은 전투용 배의 훈련장이기도 하였고, 흉년에는 관청이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에게 곡식을 나눠 주었던 장소이기도 했다. 양화나루라는 이름은 “버들꽃 나루”라는 뜻으로, 인근 강변에 버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당시 양화나루는 주변 경관이 빼어난 뱃놀이 명소이기도 했다.

잠두봉은 양화나루 옆에 솟아 있는 20m 높이의 암벽으로, 봉우리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866년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한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군이 강화도에 침입했을 때, 잠두봉은 조선군의 방어 기지로 활용되었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 당했기 때문에, “머리를 자른 산”이라는 뜻의 절두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가톨릭 신자들의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67년 10월 이곳에 성당과 박물관을 세웠다. 박물관은 2008년에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사료와 순교자의 유품을 포함하여 약 5,000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해마다 상설 전시와 기획 전시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