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할미산성
용인 할미산성 Halmisanseong Fortress, Yong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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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용인 할미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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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Halmisanseong Fortress, Yongin |
한자 | 龍仁 할미山城 |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마성리 산41 |
지정(등록) 종목 | 경기도 기념물 제215호 |
지정(등록)일 | 2007년 9월 17일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
시대 | 삼국시대 |
수량/면적 | 73,504㎡ |
웹사이트 | 용인 할미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산성은 적의 침입에 대비해 전투에 유리한 산을 이용하여 쌓은 성을 말한다. 용인 할미산성은 경안천, 탄천, 신갈천 등 하천의 흐름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석성산을 사이에 두고 고갯길(작고개, 백현)이 형성되어 있어 동서 방향의 교통로까지 통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성을 쌓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이 한강 유역을 놓고 다툰 삼국시대에 신라인에 의해 쌓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5세기 중후반~7세기 중반 탄천을 중심으로 한 마북동, 보정동 일원의 생활유적에서 백제, 고구려, 신라 유물이 모두 출토되고 있어 신라가 본격적으로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이전부터 용인지역에 백제 마을이 존재했고 거기에 고구려 영향, 이후 신라화되는 연속적인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 일대 신라인들이 할미산성의 축성과 운영에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할미산성은 2011년부터 2020년까지 7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성 내부에 물을 저장하는 집수시설, 제의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팔각형 건물지, 적이 침입해 오는 것을 살피기 위한 망루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굽다리토기, 화살촉, 갑옷조각 등 천 여 점이 출토되었는데, 주로 6세기 중반~7세기 중반에 해당하는 신라 유물이 출토되어 이 기간 동안 신라에 의해 축성․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용인 할미산성은 산성 내 다양한 시설이 남아 있고 신라 산성의 축성법, 건축기법 등을 잘 보여준다. 또한 사용시기(6세기 중반~7세기 중반)와 사용주체(신라)가 명확하여 한강유역 신라 산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영문
Halmisanseong Fortress, Yongin
영문 해설 내용
할미산성은 할미산(해발 349m) 정상과 그 남쪽의 능선에 축조되었다. 경안천, 탄천, 신갈천 등 인근의 하천과 주변 평야지대가 모두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며, 서울과 남부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에 있다.
성을 쌓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 삼국이 한강 유역을 놓고 다투던 때 신라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마북동과 보정동 일원에서는 5세기 중후반~7세기 중반 탄천을 중심으로 조성된 유적지가 발견되었는데 이곳에서는 백제, 고구려, 신라의 유물이 모두 출토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용인 지역에는 원래 백제의 마을이 존재했고, 그 이후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며, 6세기 중반 신라가 본격적으로 한강 유역에 진출하면서 신라의 영역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할미산성에서는 2011년부터 2020년까지 7차례의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성 내부에서는 집수시설, 제의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팔각형 건물지, 적이 침입해 오는 것을 살피기 위한 망루시설 등의 유구가 발견되었다. 유물은 굽다리토기, 화살촉, 갑옷 조각 등 천 여 점이 출토되었으며, 주로 6세기 중반~7세기 중반에 해당하는 신라 유물이 출토되어 이 기간 동안 신라에 의해 축성 운영된 것을 알 수 있다.
할미산성은 산성 내에 다양한 유구가 남아 있고 신라시대 산성의 건축기법 등을 잘 보여준다. 또한 사용시기와 사용주체가 명확하여 한 강유역 신라 산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