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간정사
남간정사 Namganjeongsa Village Study Ha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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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남간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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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Namganjeongsa Village Study Hall |
한자 | 南澗精舍 |
주소 | 대전광역시 동구 충정로 53 (가양동) |
지정(등록) 종목 |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
지정(등록)일 | 1989년 3월 18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남간정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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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남간정사는 조선 숙종 때인 1683년에 송시열(宋時烈)이 흥농동(현재 동구 가양동)에 세운 서재 ‘능인암’ 아래에 건립한 서당으로, 만년에 후학들과 강론했던 곳이다. ‘남간’은 ‘양지 바른 곳에 흐르는 개울’을 뜻하는데, 주자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주자의 시 운곡남간(雲谷南澗)에서 따왔다고 한다. 건물은 건립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간정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전체 8칸 규모로, 가운데 4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측 2칸은 온돌방이다. 또한 동쪽에 있는 2칸 중 앞쪽의 대청과 연결된 누마루는 대청보다 높게 하여 그 밑에 함실을 두었고, 누마루 뒤쪽에는 온돌방이 있다. 대청마루의 앞뒤와 동편 창호는 모두 띠살문(문살 위, 중간, 아래 세 곳에 띠 모양으로 배치한 문)으로 된 들어열개(위쪽으로 들어 여는 문)로 되어 있다.
기단은 자연지반 위에 돌을 깔아 구축하였으며, 대청마루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은 모두 토단(土壇: 흙으로 쌓아서 만든 단) 위에 초석을 얹어 놓았다. 주초석은 자연석과 8각으로 가공한 초석이 함께 사용되었고, 모서리 추녀 끝에는 활주(무엇을 받치거나 버티는 데에 쓰는 굽은 기둥)를 세웠다.
남간정사는 전면의 반석 위에 연못을 조성하여 출입은 전면이 아닌 후면으로 하도록 되어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이에 따라 후면의 샘물과 대청마루 밑으로 흐르는 물, 동쪽의 계곡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이 만나 연못을 이루도록 하였다.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하나 두었는데, 이는 신선이 사는 봉래산을 의미하는 전통 조경의 정형이기도 하다.
남간정사 오른쪽에는 일제강점기에 소제동에서 옮겨 지은 기국정이 있고, 뒤편 언덕에는 후대에 지은 사당인 남간사가 있다.
영문
Namganjeongsa Village Study Hall
영문 해설 내용
남간정사는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송시열(1607-1689)이 1683년에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건립한 서당이다. 남간정사가 있는 흥농마을(지금의 가양동)은 송시열이 젊은 시절에 살았던 곳이다. ‘남간’은 ‘양지 바른 곳에 흐르는 개울’을 뜻하며, 건물은 건립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남간정사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조경으로 유명하며, 가장 큰 특징은 건물 아래로 물길을 낸 것이다. 건물 뒤쪽에 있는 샘에서 내려오는 물이 건물 아래의 물길을 지나고, 동쪽의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과 만나 연못을 이루도록 하였다. 연못 가운데에는 둥근 인공섬을 두었는데, 이는 한국 전통 연못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신선이 사는 상상 속의 산을 의미한다.
정사 건물은 자연 지반 위에 돌로 쌓은 기단 위에 세웠다.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고, 오른쪽의 온돌방 앞에는 대청과 연결된 누마루를 두었다. 대청과 누마루에는 모두 띠살문을 달았는데, 위로 들어 열 수 있게 되어 있다. 팔작지붕의 네 모서리에는 지붕의 무게를 받치도록 보조기둥을 두었다. 건물 앞에 연못이 있기 때문에 뒤편으로 돌아 들어가야 안으로 출입할 수 있다.
연못 앞에 있는 기국정은 소제동에 있던 송시열 집의 별당이었는데, 1926년에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 남간정사 뒤에는 송시열을 기리는 사당인 남간사가 있다.
갤러리
남간정사 배치도 [1]
참고자료
- 옛모습 되찾은 남간정사의 봄, 디트NEWS24, 2015.04.11. http://www.dtnews24.com/news/articleView.html?idxno=376755 -> 대전시는 지난 2013년부터 남간정사 보수공사를 시작했는데 문화재위원 및 관계 전문가의 현장 자문 등 남간정사에 대한 정밀고증을 통한 옛모습 찾기에 나섰다. 특히 문화재전문가 자문 등을 통해 후대에 만들어진 관리사 경계담장과 협문을 제거해 남간정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아름다움을 더욱 잘 느낄 수 있게 됐다.
- 남간정사, 대전시 동구 관광문화축제 홈페이지 https://www.donggu.go.kr/dg/tour/contents/598 ->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를 이끌어낸 건축물로 알려진 이 건물의 앞마당 반을 차지하고 있는 연못은 이곳 정원을 완성하는 주요한 요소. 연못에 흘러드는 물은 강학공간인 대청 아래로 흘러드는 물과 계족산 쪽에서 마당을 가로질러 흘러드는 물로 채워지는 구조를 하고 있다. 연못의 중앙은 동그란 섬을 만들어 정적인 가운데 변화를 주고, 건물의 일부분 외에 연못 주변은 원래 있던 자연석을 그대로 두고 조경을 마무리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정원에 끌어들이고 있다. / 남간정사는 정원이 조성되어 있는 외삼문과 강학당과 사당이 위치하고 있는 공간인 내삼문 등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뉘는데, 외삼문 공간의 마당에 들어서서 좌측, 담장 옆의 연못가는 남간정사의 정원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포인트다. 남간정사와 연못이 어우러진 자연스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연못외에 나머지 공간은 본래 협소한 공간은 아니었다. 선생이 소제동 소제방죽 옆에 세웠던 건물 구기정을 옮겨놓아서 마당이 협소해졌는데 소제방죽을 메꾸기 전 당시의 소제방죽에 연꽃을 심고 건물 주변에는 국화와 구기자를 심었다 한다.
- 남간정사, 문화콘텐츠닷컴 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61900340001 -> 남간정사는 우암이 초년기에 공부하던 회덕 비래동의 아름다운 산수를 즐겨 선생 80세조에 지은 건물이다. 이곳에는 원래 흥농서당이 있었으며 선생이 생전에는 능인암 등의 강학처가 있었다. 선생 사후에는 후학들이 종회사(宗晦祠)를 세우고 주자, 우암, 수암을 배향하였고, 그 후 대원군 때 훼철되었고 1936년 사람과 후손이 남간사를 건립하여 우암, 수암, 석곡을 배향하고 제향을 받들어 왔다(남간사유회, 1998: 103). 현재는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으로 편입되었고 시지정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 남간정사 일대 약 16,000여 평은 1991년부터 1997년에 이르는 시기에 ‘우암사적공원’ 조성으로 대대적인 변모 과정을 거치게 된다. / 주자의 무이구곡을 묘사한 운곡이십육영(雲谷二十六詠)시 중에서 제2시 ‘南澗’이란 시의 뜻을 취해 정사의 당호를 짓고 그가 평생을 바쳐 따르고자 했던 주자와 그의 이상향으로 간주되었을 무이구곡을 재현하기 위해서 빼어난 환경과 맑은 시냇물은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